영화 취화선
“사람들은 내 그림에서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거기에 발목 잡히면 그냥 끝나는 거야.”
*
임
권
택
감
독
이승우 작가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나서 다시 보게 되었다. 짧은 문장을 읽는 것 같은 화면의 짜임새와 지체 없이 쏟아져 나오는 주인공 오원 장승업 역할을 맡은 배우 최민식의 포효와 울분이 담긴 신들린 연기가 내 눈을 홀렸다. 장승업의 평생의 은인이던 실패한 개혁가 김병문(안성기 역)의 백발이 서린 머리와 흰 눈 위에 볼품없이 놓인 맨발. 극적으로 다시 만난 장승업에게 힘겹게 내뱉는 일장춘몽이라는 대사와 함께 ‘모든 것이 꿈이로다’라는 명창의 소리로 영화가 마무리될 때 즈음에 나는 내가 봤던 영화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장승업이 도자기 굽는 가마에 몸을 넣고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은 똑같았다. 하지만 그 장면이 평생 괴롭게 사투를 벌이던 어떤 야인의 마지막이라기보다는 가늘게 내리는 비처럼 세상 곳곳에 다시 흩뿌려질 것을 약속하는 거대한 고독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장승업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서 가진 것 없이 태어난 비렁뱅이 출신이다. 그런 그는 신의 재능을 가졌고 양반(김병문)의 눈에 띄게 된다. 그 재능은 보살핌을 받게 되고 좋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뜻을 키워간다. 재주는 날개를 달고 끝을 알 수 없는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간다. 환쟁이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비할 데 없이 우뚝 선다. 후에 “그의 그림을 가지지 못하면 사대부가 아니라더라”, “요즘에는 장승업 그림 빼고는 대화가 안 되더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된다.
이 영화는 그런 장승업이 술과 여자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설과 세태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 만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의 예술가적 고뇌를 중심으로 풀어간다.
*
구한말 조선은 쇠락의 길로 떨어지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밀고 당겨지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영화에서는 그 모습을 우회로 보여준다. 하지만 망조로 이끄는 정치적인 사건들은 장승업의 그림에서 표현되지 않는다. 현실은 이토록 나락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는 현실의 모습을 담는 진경(眞景)이 아니라, 신선과 추상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선경(仙境)을 주로 그린다. 자신을 길거리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김병문 선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릴 것을 권하지만 장승업은 자신의 그림은 그림일 뿐 정치적이거나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고 한다.
현실과의 분리.
오롯이 미적 완성으로만
세상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는 현실과 이상의 관계처럼 모순적인 모습을 곳곳에 표현한다. 양반들이 모여서 장승업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한가로이 감상할 때, 창 밖에는 거지들이 구걸을 한다. 일본 기자가 장승업의 그림 한 점을 구하러 왔을 때, 그들 서로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내부자 밀고로 인해서 잡혀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처럼 무겁고 비정하며 잔인하지만, 그의 그림은 그것을 뛰어넘어 계급과 국력의 차이를 품고 감동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오원 장승업의 그림 그리는 행위는
현실적 도피인가 이상적 세계의 구현인가.
모든 것은 꿈이다.
영화는 픽션이다.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그리고 진정 어떤 모습이었는지 추측만을 할 뿐이다. 원작 소설은 그의 기록이 정확하게 내려오지 않아서 정확하게 서술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승업의 삶을 다룬 이 영화 역시 그의 말대로 우리가 그를 통해서 보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 밖에 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래, 아무렴 어떨까. 그래서 나는 그 속에서 본 것은 한밤의 꿈과 같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왕명까지 어기며 자유를 선택했다. 자신을 칭송하는 말들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때로는 꾸짖고 싸우고 도망쳤다. 그래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과 같은 명성을 원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자유를 꿈꿨을 것이다.
천한 출신 화가 장승업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과 꿈을 당당히 그릴 줄 아는
인간 장승업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 쏟아지는 칭찬은 어쩌면 자신의 신분과 한계를 인정하라는 달콤함 유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알았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이 세상을 뛰어넘기 위해 그토록 치열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는 신이 내려주신 재능을 알아챘기에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 또는 그 옆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장승업은 양반집 규수를 짝사랑하고 기생과 살림을 차리고 천주교 박해를 피해 달아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여자와 사랑을 나누다 헤어진다. 평생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했지만, 손이 떨리고 거동이 불편할 때 즈음에 평생동안 찾았던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하룻밤 신세만을 진채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떠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그림을 도자기에 새겨 넣는다. 강물 위에서 배를 모는 어느 남자의 모습이다. 배 밑에 일렁이는 물결을 몇 개의 곡선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하얀 도자기 위에서 작지만 꽉 차 보였다. 이후 그는 떡 한점 입에 넣고 불가마에 몸을 넣어 증발한다.
그의 격한 인생은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운 선과 색채로 우리 곁에 남았다. 그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의미로 배분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술적 토대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또 꿈을 꾼다.
일장춘몽이고
모든 것은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는 또 꿈을 꾼다.
©️ keyp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