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는 전기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기록된 역사와는 달랐다. 사실 인물을 두고 픽션을 만드는 작업은 시비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많지만 또, 그만큼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적당하다. 창작자는 이러한 대중의 관심을 이용해 역사적 인물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신화에 가까운 위인전은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위한 목적으로 많이 쓰여졌다는 것은 이러한 점을 방증할 수 있는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인 곽원갑이라는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19세기 말. 사람이 붐비는 큰길 가운데 대련장이 있다. 그곳에서 무도인들은 각자 목숨을 내어 놓겠다는 각서를 쓰고 천하제일 무술대회 같은 형식으로 합을 겨룬다. 곽원갑(1868 ~ 1910)은 이 결투장에서 절대고수였고, 한 번의 발차기와 주먹에 상대가 나가떨어질 때도 있었다. “귀찮으니 한꺼번에 덤비도록 하자”라고 할 만큼 비교대상이 없는 강자였다. 대중은 그를 향해 열광했고, 앞 다투어 제자가 되고자 했다.
그런 그는 고독하고 외로운 고수가 아니라 술과 유흥을 즐기는 오만방자한 무법자였다. 무도에 대한 의미를 오로지 승부에서 찾았고, 승리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의 재정적, 정신적 후원자였던 친구 농경손은 그런 그에게 함부로 제자를 받지 말고 됨됨이를 먼저 보라. 의미 없는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대의를 품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데 힘을 쓰라는 등의 조언을 한다. 하지만 아무도 상대할 사람이 없는 곽원갑에게 친구의 뼈 있는 충고 또한 쓸데없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자만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곽원갑이 승리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한다. 어리숙하고 야비한 제자가 경쟁자 진사부에게 맞았다며 거짓을 일러바치고 이로 인해 잔뜩 화가 난 곽원갑은 진사부의 생일잔치 장소를 찾는다. 결국 혈투가 벌어지게 되고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진사부는 그 싸움으로 인해 죽게 된다. 앙심을 품은 진사부의 양자는 보복으로 곽원갑의 어머니와 딸 등 가족을 모두 죽이고, 곽원갑이 찾아왔을 때 그 앞에서 자결한다.
곽원갑은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모든 것을 뒤로 두고 타지에서 거지 행세로 방황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 죽을 고비를 맞이했지만 다행히 행인들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깊은 산속 어느 한적한 농촌에서 그를 살려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논일을 거들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실제 곽원갑은 영화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가 어릴 적 체력이 약해 아버지를 이어 무도 명문가의 후계자로 지목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전국 무파를 규합하여 정무 체육회를 조직하고 동아병부 즉, 아시아의 병든 나라라는 치욕을 씻기 위한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일치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벌어지는 대결들은 픽션이다. 마지막 결투에서 주최 측의 속임수로 인해 독약을 마신 뒤 일본 무도인을 상대로 아름다운 패배를 당하고 죽는 장면 또한 픽션이다. 실제 그의 사인이 독살이냐 지평인 폐병이냐는 아직도 설왕설래 중이다.
마지막에 상무정신(尚武精神)이라는 휘호가 나오는 데 이는 쑨원(1866~1925)이 정무 체육회에 내린 것이다. 무인 곽원갑이 죽고 나서 1년 뒤에 쑨원은 신해혁명을 통해 부패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지금의 중국(중화민국)을 탄생시켰다. 청나라가 아편전쟁, 청일전쟁에서 연달아 패하면서 그는 서양 무기를 도입하여 근대식 군대를 갖추는 등의 힘 있는 나라로 거듭나기 위한 활동(양무운동)을 진행했다.
당시 서양 열강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던 중국은 무술과 수련을 중시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쑨원과 곽원갑은 그것이 형식과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릴 때 얼마나 공허한지 알았다.
진정한 힘이란 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둘은 열강의 근대 무기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청나라의 구태의연함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강호와 무림 고수 같은 것은 허상일 뿐이었다. 우물 안에 갇힌 신세를 알게 된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 뛰던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강해지기 위해서 배워야 했고 배우기 위해서는 비워내야 했다. 곽원갑은 그런 의미에서 결국 힘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쑨원은 부패와 무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 내적 깨달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곽원갑이 세운 정무 체육회가 보여주었던 옛 무술을 근대식 교육으로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했던 의지는 형태를 떠나 강한 중국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했을 것이다. 그런 정무 체육회를 세운 곽원갑의 철학은 무술이 개인의 영달에 머물지 않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승리는 승패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데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영화에서는 곽원갑이 독약으로 이미 망가진 몸을 이끌고 아름다운 패배를 선택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뜻깊은 승리를 얻는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쑨원은 승리라는 소의 대신 민중의 단결과 자긍심이라는 대의를 선택한 곽원갑을 칭송했을 것이다. 그래서 상무정신이라는 휘호를 내렸을 것이고 이 영화처럼 곽원갑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해 많은 계몽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영화에서 곽원갑은 마지막 결투 상대자인 안도 다나까라는 일본 무도인의 초대를 받아 차를 나눠마신다. 그곳에서 그의 무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화가 장면에 담긴다.
안도 다나까가 다도에 대해서 묻자 곽원갑이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자 안도 다나까는 좋은 차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곽원갑은 이런 말로써 알고 싶지 않다고 한다.
곽원갑 :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알려하지 않습니다. 차의 등급을 따지고 싶지 않아서요. 차는 차이지요.
안도 다나까 : 하지만 차란 것이 저마다 특성이 다르니 등급을 매길 수밖에요.
곽원갑 : 뭐가 고급이고 뭐가 저급이겠오? 모든 차는 자연 속에서 함께 자라니 차이가 없지요.
안도 다나까 : 차에 대해 알게 되신다면 선생도 자연스레 고급과 저급을 따질 겁니다.
곽원갑 : 그렇겠지요. 하지만 자고로 차는 스스로 등급을 결정하지 않아요. 사람이 정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것이죠. 난 그것을 원치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술로 승패를 나누는 것은 어떤 무술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도인에 한정된 것일 뿐이고 또한, 그것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수단으로 삼을 뿐이라고 한다.
진정한 승리는 결국 자신을 넘어설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나를 넘는 일이지만 결국 주변 사람들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더 나아가 역사를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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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현대사를 거슬러가며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이연걸이라는 대배우의 화려한 액션은 보는 내내 황홀하다. 나는 이런 액션 영화의 보는 즐거움과 단순한 스토리가 좋다. 진리는 단순하다. 누군가 명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네 개의 코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14년 전 봤던 그때 그 영화가 이렇게 읽히는 것 또한 새로웠다.
©️keyp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