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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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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아 아빠 힘들어. 이제 그만 내려갈까?” 나는 흐르는 땀으로 젖은 셔츠와 안고 있는 지상이 무게에 점점 저려오는 팔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러 시러! 위로 위로! 미끄럼틀!”이라고 지상이는 온갖 인상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려왔던 길, 약 45도 이상 기울어진 그 오르막길을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간쯤 올라왔더니, 지상이는 갑자기 다시 내려가자고 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이제야 집에 갈 수 있구나 속으로 안도하며 행여나 지상이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투벅투벅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갑자기 지상이는 다시 올라가자고 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미끄럼틀 타고 싶어!!” 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긴 장마 기간 동안 오랜만에 맞이한 기분 좋은 햇살이 더위로 나를 짓누른다는 생각에 괜히 원망스러웠다. 그래 육아로드도 이 놈의 햇살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가자고 지상이를 보채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45도 기울어진 경사를 타고 20여분 올라가면 나타나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와 한가로이 양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언덕을 향해 걸었다. 물론 지상이를 안은채.
오후 열두시 반.
도착한 지 한 시간 반이 지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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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도착하니 대충 쌓아 올린 가건물에 사무실과 카페가 딸려 있었다. Coffee & snack이란 글자가 크게 외벽에 붙어 있었고, 1층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 건물 입구에 양에게 줄 수 있은 사료 교환권을 판매한다는 안내가 눈에 띄게 붙어있었다. 사료 주기 체험을 교환권까지 갖춘 시스템으로 만들었다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2층 카페에 올라 입장권을 사 듯 2000원을 내고 한 장 받아왔다. 뒤에 막상 양이 있는 동산에 올라가 보니 교환권은 굳이 필요 없었다. 현장에서 돈을 내고 건초나 사료를 바가지에 받아 양과 토끼에게 줄 수 있었다. 왜 굳이 저렇게 만들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분명 더운 여름날 공원 꼭대기에서 사료를 나눠 주시는 어르신들과 시원한 건물 안에 커피를 내리는 젊은이들 사이에 미묘한 경제원리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입장권 같은 사료 교환권을 들고 양이 있다는 동산으로 향했다. 건물 앞에 이어진 길은 곧 세 갈래로 나눠졌다. 왼쪽 아랫길은 수국이 피어 아름다운 산책길이었고, 오른쪽 윗길은 놀이터, 양과 토끼가 있는 동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당연히 양이었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약 20여분 힘겨운 산행을 감수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몇 걸음 떼지 않고 지상이는 힘들다며 안아 달라고 했고 나는 아들을 품에 안고 천천히 올라갔다. 가는 길 양 옆에는 숲소리라는 이름처럼 계곡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등이 흘러나와 기분이 상쾌했다. 자리를 펴고 앉아 쉴 수 있는 평상도 있었고, 중간중간 벤치가 있어 연인과 함께하면 여유를 부리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에 안겨 있던 지상이는 옆에 보이는 계곡에 작은 폭포가 보이자 가보자고 보챘다. 하지만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멀리서 구경만 하다가 버섯이 자라고 있다는 키 반만큼 높이의 비스듬히 움막처럼 세워진 나무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상쾌한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에 잠시 쉬었다 가면 딱 좋았겠지만, 상상하기도 벅찼다. 뛰어가는 아들 꽁무니를 잡거나, 넘어져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느라 공원이 마련한 여유는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꿋꿋이 겨우겨우 올라 놀이터에 도착했다. 바닥이 푹신했고, 밟으면 거의 3센티 정도는 들어갔다가 나오는 기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지상이는 뛰었고 초등학생이나 되어야 즐길 수 있는 미끄럼틀과 구름다리는 “아빠. 아빠. 나도 나도”라며 애원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안 된다는 나의 말에 빠른 포기를 했고, 최종 목적지인 양과 토끼가 있는 동산으로 올랐다.
양들은 모두 건초나 사료를 들고 있는 사람들 주변에 모여있었다. 초록 빛깔 풀들이 능선에 곱게 자라 있었지만 양들은 사람들이 바가지에 담아서 입 가까이 내어 놓은 말라서 색이 바랜 건초 더미에 더 관심이 많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건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아니면 울타리 너머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이는 인간의 속성과 닮은 것일까. 어쨌든 우리는 입구 카페에서 샀던 사료 교환권을 내밀며 “이거 드리면 되나요?”하고 나이가 지긋이 있어 보이는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께서는 힐끗 종이 내용을 쳐다보시더니 “네, 이거 가져가면 됩니다.”하시며 건초보다 조금 더 노력이 들어간 것 같은 작은 원기둥 모양의 사료를 주셨다. 그 밑으로 작은 상자에 천 원짜리 지폐가 가득 쌓인 것을 보니 현금으로도 살 수 있는가 보다 생각했다.
지상이는 양에게 곧장 달려가 바가지를 쭈욱 내밀며 “양아 이거 먹어.”라고 했다. 양이 무표정으로 울타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입을 바가지 속으로 넣자 지상이는 바가지를 떨어뜨렸다. 땅에 흘린 사료를 양이 먹으니 지상이는 “양아, 땅에 떨어진 것 먹으면 안 돼”라는 말을 했고, 그 모습이 자기 밥 먹을 때 내가 했던 모습과 닮아 크게 웃음이 났다.
내가 지상이 손을 잡고 바가지를 다시 양에게 내밀었더니 들어오는 양의 입 무게가 상당했다. 그렇게 양은 이천 원 치 식사를 단 5분 만에 해치웠다. 지상이는 “아빠 한 번 더 줘볼까.”하며 천연덕스럽게 손가락을 들었다. 별 수 없이 이번에는 돈으로 건초를 샀다. 다시 양에게 주기를 몇 번 하고는 토끼우리로 갔다.
꼬마 아이들은 어디서 당근을 구해와 도끼를 먹이고 있었다. ‘그래 도끼는 당근이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건초도 먹을까 의심했지만 지상이가 내민 건초를 곧 토끼 한 마리가 다가와 먹었다. 신기했다. 건초도 먹는구나. 이후에 지상이는 당근을 주는 아이들에게 밀려 제대로 먹이를 줄 기회가 없었다. 누군가 주다 실패한 당근을 하나 겨우 잡아 먹이니 그것도 좋고 신기한지 소리를 지르곤 했다.
+
전반적으로 아주 좋은 공원이었다. 규모를 떠나서 가족단위로 와서 쉬어가면 적당한 것 같았다. 일부러 거창하게 여행 같은 것이 아니라 소풍 가는 기분이면 적당해 보였다. 지상이가 어려서 오르막길을 왕복하는 수고를 반복 하기는 힘들어 금방 다시 오기는 힘들겠지만, 언젠가 한 번 더 가고 싶다. 그때는 자리도 펴서 누워도 보고 가져온 음식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거제 양 떼 목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숲소리가 진짜 일품인 것 같았다. 양이나 토끼 같은 한 번의 독특한 경험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 발길로 분주하기는 하지만 일상과 조금 떨어져 숲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숲소리공원
경남 거제시 거제면 서상리 산13
http://naver.me/FBEvFot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