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공원

통영

by 랩기표 labky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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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서늘한 바람이 불고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수국이 아름답게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높게 세워져 있었고, 동상의 시선 앞에 펼쳐진 전망은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보는 이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해 주었다. 통기타를 들고 버스킹을 하는 청년이 있었고, 맞은편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흥을 타고 노는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상이는 공원 입구에서 작은 트럭에서 사 왔던 비싸고 맛없는 아이스크림을 얼마 먹지 않고 내 손에 버리듯 맡겼고 나는 아까워서 작은 숟갈로 금방 다 파먹었다.

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수국은 그 길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꽃무리 사이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어 저마다 비집고 들어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 틈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 욕심이 짓이겨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자연스러워 보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시 짧은 평지가 나왔고 화장실이 보였다. 그 반대편 아래는 작은 바다가 있어 잔잔한 파도가 공원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부름에 충실히 내려갔고 아이들은 돌멩이를 주워 던지기 시작했다. 기웅이 형은 어제 받았다는 스타벅스 로고가 적힌 간이 의자를 펼쳤다. 파도소리와 서늘한 바람과 절벽 아래 그늘에 있으니 낮술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나은 게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유유자적한 형을 혼자 두고 아이들과 형수와 함께 공원 끝까지 걸었다.

이순신 공원이란 이름은 다소 진부했지만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격전의 전투가 있었던 바다를 두고 있으니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원 끝에 서서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한산도로 보이는 섬이 있었다. 오백 년 전에 그곳에는 열몇 척의 배로 70척이 넘는 왜군에게 대승을 했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난중일기 7월 초 8일(한산도 대첩 당일)



누군가는 이곳에서 서서 침략자들의 배가 가라앉고 적들이 비명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박수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그때 피 내음이 진동했던 견내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은 이렇게 기분 좋게 시원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이 바다를 끼고 척박한 삶을 살아왔던 조상들은 이곳이 이런 멋진 공원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이 여유를 부릴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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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그리 크지 않는 곳이라 곳곳을 누비는 기에 쉬운 걸음이었다. 공원은 산비탈을 깎은 것 같았는데, 그 중턱에 놀이터가 있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신나게 타고 내리며 뛰어다녔다. 오랫동안 서 있으니 덥고 따가운 것을 보니 여름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조금 넘게 공원에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돌아와 그 맛없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못된 눈길로 바라보고 차를 탔다. 이후 통영 국제 음악당에 와서 간단히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맛도 운치도 아주 일품이었다. 왜 처음 왔을까 의문이 들었다.

남해 끝, 작은 섬에 살면서 통영을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기분이 좋았다. 가깝고 몇 번의 왕래가 있어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고 있던 아름다움이 많은 곳이다. 모든 게 마찬가지다. 익숙해서 안다고 했던 것들은 사실 모르는 게 더 많다. 사람도 삶도 공부도 세상도 물고기도 공룡도 모두 다.

기분 좋게 다시 거제도에 있는 아파트에 모두 모여 저녁을 먹었다. 다시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오니 형은 이때 꼭 들어야 한다며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른 L'appuntamento 노래를 틀었다.


아!


전율에 떨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하게 앉아서 지상이랑 놀던 그 거실에서 전율이 흘렀다. 그래 난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 근사한 삶이란 거창하게 많은 것이 필요 없다는 것. 음악과 술과 사색과 좋은 사람과 따스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작은 용기가 만든 감동이 있었던 날이다.


https://youtu.be/Mfzlw_d88Nk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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