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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전화를 받은 박은 고민했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어리둥절했다. 이게 현실이 맞는지 그리고 정말 자신이 이 일에 적합한지 혹은 기대에 실망만 주지 않을까 등등의 고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박은 몸살 같은 영혼의 떨림에서 벗어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람들은 꿈을 이루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꿈이 실현되는 순간 뒤에 낭떠러지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후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박시영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7일 후 박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입사를 위한 몇 단계의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 김 부장과 함께 사장을 독대했다. 사장은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사라 박은 연예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사장은 기대가 크다는 말과 함께 박이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를 자주 보고 있다고 했다. “참 좋았습니다. 와인 이론을 넘어서 와인을 매개로 다양한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이, 와인의 맛을 혀뿐만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까지 전달해준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사장은 계속 박에 대한 칭찬과 질문을 김 부장의 추임새에 맞춰 이어갔다. 박은 부끄럽게 웃으며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첫인상에 좋겠다는 생각에 되도록 대답은 짧게 했다. 마지막으로 사장은 갑자기 백화점 푸드 사업부의 혁신과 전 사업부의 새로운 전환이 되기를 바란다는 부탁에 박은 그제야 물을 한 잔 넘기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김 부장은 “최선은... 누구나 다 하는 거 아니겠어요? 잘해야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불쑥 끼어들었다. 사장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그가 대독 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웃으며 “자 이제 파이팅해봅시다!”라고 악수를 청했다.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000 백화점이 와인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와인 판매 시장을 확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창한 말은 쉬웠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기는 힘들었다.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던 부장과 달리 주변 사람들은 의심과 질투 섞인 반감을 툭툭 던지기만 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가 밤새워 프로모션 한 와인과 특별 이벤트는 각종 언론에서도 칭찬을 했다. 기업의 경계를 허무는 사례에 박에 대한 스토리와 인터뷰가 실렸고, 새로운 직업의 탄생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재능과 열정은 평범함을 바라는 조직 습성에 흡수되어 갔다.
“팀장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관리부서에서 합의받기가 힘듭니다.”
“아니, 왜요? 팀장인 제가 사인했잖아요. 사장 직속 부서로 변경되면서 이미 합의된 이야기라고 하세요.”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그 출장 건들도 사실 엄청 욕 많이 먹었습니다. 원가절감이 시급한 시점에 가시적인 성과 없는 비용은 무조건 줄이라고 합니다.”
박은 가득 불만을 품고 부장께 이 사실과 잘못된 관행에 대해 토로했지만, 뚜렷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부장에게도 상사가 있었고 주변 눈치가 있었다. 박이 입사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실질적인 뚜렷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했던 일을 현실에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보이지 않는 무수한 관문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차곡차곡 하나둘 넘기며 겨우 실행하다 보면 이미 때를 놓치거나 경쟁사에 뒤쳐지기 일쑤였다. 늦었다고 판단해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예산이 집행 되었고, 최종 결론이 난 일을 취소하는 것은 경영층의 부족함이 드러나 리더십을 잃게 된다는 어이없는 이유였다. 박은 처음에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항의도 했지만 이내 그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 시간과 감각의 차이를 고려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박은 스스로를 잃어가며 예전 직장에서 가졌던 ‘지겨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전에 비해 그의 책임과 업무가 막중해 자신이 즐겨하던 일들, 특히 블로그와 커뮤니티를 운영할 여력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박 팀장, 지난 분기 실적이 왜 이런가?”
“사장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나파밸리에서 굉장히 좋은 와인이 이번에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택트 시대에 소수를 위한 홈파티가 유행이고, 배달 서비스에 신선함을 넘어 특별함을 담은 와인이...”
“그만하게. 박 팀장. 사실 이번 주 경영임원회의에서 자네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네.”
박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고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감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기업 문화가 너무 경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에는 사장이 고개를 끄덕일 뿐 그저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박은 와인을 사랑한 지 3년 9개월 만에 직장을 잃고 퇴직금으로 여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