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계획은 있다.

오키나와 여행기 3

by 랩기표 labkypy

우리는 계획이 있었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여행 셋 째날 일정은 가득했지만, 처음부터 삐걱하더니 결국 오늘 저녁도 가까운 슈퍼마켓에 들러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지상이가 오전부터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급기야 열까지 나는 바람에 약을 먹였고 지금은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끼니도 거른 채 잠만 자고 있다. 우리 부부는 그런 지상이를 걱정하며 바다가 보이는 쿠바 느낌의 숙소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내일의 걱정까지 몰아서 하느라 더 피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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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라우미 수족관은 아주 좋았지만 지상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큰 수족관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고래도, 마치 하나의 쇼룸처럼 형형색색 황홀한 신비로운 자연의 작품도 지상이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만 신난 건가?


밖으로 나와 꽤 오래 걸었던 에메랄드 해변에는 적당한 온도의 바닷물과 내리쬐는 햇살이 있었지만 지상이는 내내 울기만 할 뿐이었다.


수족관으로 다시 돌아와 이것은 꼭 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자리 잡은 돌고래쇼의 돌고래는 잘도 뛰었지만 이때, 지상이는 거의 눈을 감았다.


어서 빨리 숙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나 세 번째 숙소의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차 안에서 지상이를 재우고 가까운 스타벅스 주차장에 멈췄다. 커피를 마셨고, 바로 옆 식당에 들러 회덮밥과 정식을 시켜 먹었지만 지상이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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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맞춰 힘겹게 숙소에 도착하니, 주차장 입구에서 짧은 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를 촬영하느라 바쁜 무리를 만났다. 이후 옆방에서 촬영은 이어졌고 그 분위기가 묘한 것을 보아 아마도 성인물을 제작하는 팀인 것 같았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옮기는 동안 불편한 눈빛을 여러 번 느꼈다.


어쨌든, 호스트의 안내에 따라 방을 열었더니 마치 쿠바에 온 느낌이다. 갈색 나무로 짜인 가구들과 큰 창 너머 보이는 식물들이 인상적이었고, 조금 먼 거리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가까이서 보는 그것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천장에 달린 나무와 철로 만든 장식물들은 여름휴가의 흥을 돋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후 일정은 지상이 귀에 꽂은 체온계가 38도를 넘어가면서 모든 게 정지되었다.


날씨 또한 그런 우리 사정을 알고 약을 올리는지 비까지 시원하게 내려주며 우중충한 날이 되어버렸다. 지상이가 더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지만, 이 여행을 며칠 동안 준비한 수유는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고 힘이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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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도 거창한 계획이 많았던 날들이 있었다. 스스로 맺은 꿈의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 년 365일 내내 바빴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나 때문에 빈번히 파투가 나거나 완벽하지 않게 진행되던 날들이 많았다. 그럴때면 나는 여러 번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했고, 친구들은 괜찮다고 하거나 농반진반 그러다 우리 다 떠나간다고 했었다.


어느 날부터 계획했던 일들이 틀어지기 시작했고, 가라앉는 배는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둘러 나오지 못한 선장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정도였고, 선원들은 더 이상 나의 이상과 계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책임을 추궁했다. 이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숙제도 있다. 다행히 일은 틀어졌지만 친구 관계는 틀어지지 않고 더 가까워졌다.


이처럼 누구나 계획이 있지만

그대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해도 계획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 만약 그 일이 실패했다면,


계획된 과정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교훈으로 남아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 과정이 완벽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질 수 있다.


어쨌든 여행이나 인생이나 매 순간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가능성은 적다.


그리고 그 뜻하지 않은 위기나 장애를 만났을 때 기억하면 좋은 것은 그래도 이만하기를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허락된 앞으로의 시간만큼은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서,


여유를 잃어 이유가 사라지거나 허세를 위해 또 다른 허세를 부리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 계획이 틀어지면서 우리 가족의 사이를 더 돌아보고 돈독히 다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지상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빠를 괴롭히며 놀았으면 좋겠다. 계속 열이 나면 병원에 갈 생각이다.

사진=오키나와 북부 ‘somos’ 허니문으로 갔던 쿠바 느낌을 받았다.

2019. 6. 25.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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