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동석이는 눈 내리는 한라산을 혼자서 올랐다. 백록담을 오늘 꼭 봐야겠다는 엄마를 생각하며 그는 눈바람을 뚫었다. 겨우 백록담 입구에 도착했지만 동석이를 맞이한 것은 ‘입산금지’라고 써 있는 안내문이었다.
힘들게 올랐던 동석은 이내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등 뒤에서 타고 올라오는 열기가 정수리를 통해 거의 다 빠져 나갔을 때, 폰으로 주변을 찍었다.
“내년 봄에 다시 오자. 내가 꼭 데리고 올게.”
동석이는 올 겨울을 끝으로 다시 못 볼 엄마에게 말했다. 그리고 울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동석이는 엄마가 싫었다. 너무 너무 미웠다. 말도 섞기 싫었다. 남편과 딸을 잃고 부잣집에 첩으로 들어가 살면서 자신에게는 엄마라고도 부르지 말라고 했던 그녀를 증오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행동은 날이 갈 수록 그리움에서 화로 변해갔다. 서울로 도망쳐도 봤지만 결국 다시 제주에 내려오게 되었다.
동석은 포터에 이것저것 가득 싣고 촌구석을 다니면서 장사하는 만물상으로 빌어 먹었다.
장날이 되면 시장통에 쭈그려 앉아 물건을 파는 엄마가 보이는 곳에서 몸베바지를 팔았다. “골라 골라” 손벽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렸지만, 때때로 눈은 엄마를 향했다.
엄마가 말기암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동석이는 화부터 났다.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나는 아직 엄마를 찾지도 만나지도 못했는데,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했는데, 왜 떠난다는 말인가.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불효자식이라며 손가락질을 했지만 누구도 자신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기에 얄궂은 허세라고 치부했다. 말기암에 걸린 엄마를 돌보지 않으면 남은 날을 후회하며 살 거라는 말에도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슬픔보다 더 아픈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처는 긁으면 더 심해질 뿐이라는 진부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긁다가 피가 나고, 굳었다가 다시 덧난 상처에 용서라는 밴드를 발랐다. 밉고 싫은 엄마와 보낸 하룻밤 동안 거짓말처럼 상처는 아물고 나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멈출 수 없는 애절함이 돋아났다.
엄마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된장찌개를 끓여 밥상을 차려주고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동석은 엄마 곁에 누워 울면서 안는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눈물이 흘렀고, 세상 모든 오해와 아픔과 고통과 실패는 결국 사랑으로만 극복 가능하다는 클리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각자 상처가 있었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한 것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의 변화로부터 세상이 바뀌었다.
그런 그를 끝까지 가디리며 불안을 안정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럴 수 있다며 일상으로 끌어 들여 품은 사람도 있다.
사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말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이 거짓말처럼 내일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도 품고 있다.
나는 용기내 다가서고, 충분히 기다리며 변할 줄 아는 사람일까.
작가이야기 |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라이브>가 아주 인상적었는데, 이 또한 그러하다. 흔치 않은 옴니버스 구성에 화려한 배우진이 참여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작품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각자 삶의 주인공이니 출연진 중 그 누구도 객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이 드라마의 첫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