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블론드
나는 마릴린 먼로를 몰랐습니다. 노마 진이라는 본명도 물론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가 그녀를 상품화한 덕분에 섹스 심볼, 화이트 드레스, 앤디 워홀이라는 키워드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금발이 염색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블론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마릴린 먼로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불안과 고통은 “이상한 꿈”일 뿐이라며 자조하는 그녀의 무기력한 모습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애정결핍에 시달렸다는 것. 그리고 멍청하고 육감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지성을 추구한 배우였다는 등의 이미지들이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 비치는 그녀는 유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존재였습니다. 다양한 자아가 부딪혔고, 대중은 그녀를 달콤한 사탕이 되어라 강요합니다. 터지는 플래쉬 뒤에 선 중년의 남성들은 괴물처럼 입을 벌린 채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들을 보고 웃으며 “사랑해요”라는 말을 뱉는 마릴린 먼로는 과연 누구일까요?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깊어지듯이 그녀의 화려한 삶은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깁니다. 그녀 곁에서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던 남성들 또한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왜 그녀를 기억하는가
마릴린 먼로는 50~60년대 시대의 아이콘입니다. 세계대전이 종식되었고, 물질은 풍족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고, 지적인 성찰보다는 관능적인 유흥을 즐기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정의하는 것이 바로 마릴린 먼로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그 시대를 추억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기획사와 미디어로 양산된 소위 ‘스타’라는 것은 상품입니다. 상품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물질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만족감을 얻습니다.
마릴린 먼로라는 상품 안에 노마 진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이러한 현상은 비단 유명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공됩니다. 마릴린 먼로가 금발로 염색하듯이 스스로 어떤 특정한 색을 추구하면서 그에 맞는 연기를 합니다. 컨셉과 메시지가 통하는 조직, 세계에서 살아남아 나름의 인기를 얻습니다.
가공된 자아 뒤에 버려진 진실한 자아는 상대적으로 외로워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혼돈 속에 무너지는 정신은 날개 없이 추락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이 날아오를수록 그 고통은 큽니다.
불교에서는 특정한 자아에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교에서도 물처럼 우리는 정해진 바 없고 흘러가다 마주하는 상황에 맞게 머물다가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사무실에 앉은, 노래를 하는, 아이를 돌보는 나와는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적절한 시점에 손님을 맞이하듯 적당한 대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흑백, 컬러, 3:4, 16:9 비율 등으로 정말 다양하게 장면을 담아냈습니다. 마치 마릴린 먼로의 꿈속에서 헤엄을 치듯 몽환적인 감정을 끄집어냅니다. 이러한 기법이 마릴린 먼로의 정체성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우리가 그녀를 통해 무엇을 기억하든 중요한 것은 그녀는 과연 무엇이 되고 싶어했을까 하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https://youtu.be/2cCN7w9ZP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