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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Jan 11. 2023

복수는 용서보다 진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더 글로리


모든 영광은 사라졌다. 꿈꿨던 미래가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서 무너져버렸다. 이유 없는 폭력은 더 무서웠다. 원인을 찾을 수 없었기에 동은는 그저 당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잘못했다는 용서도, 그만하라는 애원도 재미로 즐기는 폭력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동은은 복수를 다짐했다. 나의 꿈은 바로 너야. 너를 파멸 시킬 거야…라는 말은 거짓 같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웃으면 혹시 복수하겠다는 다짐이 사라질까봐 웃지도 않았다. 복수의 칼이 날카로워지도록 뜨겁게 달구고 차갑게 식혔다.


동은을 괴롭혔던 아이들과 그 피해자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가난은 되물림 되었고, 부는 세습되었다. 가해자는 그럴듯한 마스크를 찾아 덮어섰고 그들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겉모습에 속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광이 오지 않을 것이다. 동은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누구나 잘못은 한다. 다만, 그 잘못이 어떤 의도였는지에 따라 돌아오는 대가는 다르다. 대중은 입에 담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에 대한 면책 규정에 화를 낸다. 반대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소년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경우에는 관용을 베푼다. 의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복수 대상이 잘못을 뉘우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폭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기쁨을 누렸다는 것을 그려내 가해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복수의 명분과 용서의 불필요를 설득한다.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인가.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폭력은 어떻게 성사되는가. 피해자가 그렇다 느끼면 성립되는 것이다. 결국 가해자의 운명은 목을 움켜쥐었던 피해자로부터 결정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분노와 아량에 따라 그 죗값을 받게 된다. 분노가 넘치는 이들에게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와 같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만약 동은이 나타났을 때,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뉘우치며 용서를 빌었다면 복수는 진행되지 않았을까. 동은은 20년 넘게 복수를 준비해왔다. 참회의 눈물 앞에서 그 겹겹히 쌓인 고통과 분노를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까. 용서를 했으니 이제는 다 괜찮아졌다고 훌훌털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자에게 복수가 허용되지 않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또한, 목숨바쳐 복수를 행한 자의 삶 또한 어떠할지 알 수 없다. 온전히 그들의 몫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기만을 바랄 뿐이다. 과거를 딛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고 응원하기는 쉽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를 했다는 말이예요.”라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의 전도연이 외치던 말이 멤돈다. 시작은 가해자였으나 끝은 피해자의 몫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에게 복수하는 자를 두고 누가 쉽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드라마에서 복수의 결말은 결국 용서와 화해로 끝날까, 아니면 공멸로 끝이 날까. 가장 만족스러운 대안은 또 무엇일까.


어렵다. 그러하기에 또 두 번째 시즌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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