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이는 하루종일 친구와 놀았다.
아이 친구는 교회를 다녔다.
친구따라 교회를 가고 싶다고 해서 일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종교적 냄새였다.
아이는 낯선 아이들이 북적대는 낯선 장소에서
근 두 시간을 놀았다.
집으로 친구와 함께 돌아와 점심을 먹고
포켓몬을 잡으러 다같이 온동네를 누볐다.
그날 저녁,
아이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아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데.”
“그래?”
“아빠랑 나랑 모두 하나님이 만드셨데. 그래서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거야.”
“그렇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데.”
“그렇구나. 나도 지상이 사랑해.”
“나도 아빠 사랑해, 그런데…크리스마스는 예수님 생일이야?“
”응“
”근데 왜 그때 태어난 거야?“
”글쎄… 지상이도 지상이 생일에 태어난 것처럼 그때 그냥 태어난 거 아닐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창조주 하나님이란 개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게 된 거 같았다.
내게 종교는 언제나 질문이다. 종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지, 커뮤니티의 생성과 유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믿기 힘든 사실이 어떻게 믿게 되는지,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동물인지,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강한 믿음이 얼마나 삶을 변화시키는지
삶은 나침반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어디를 목적으로 하는지에 따라 삶은 크게 바뀐다. 선택의 연속 안에서 우리는 결정되어진다. 그 선택에 어떠한 기준이 없다면 바람에 날리는 무작위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특정 가치에 천착해 차곡차곡 성실히 임한다면 뚜렷한 목적성을 가진 존재로 부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이 모두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개방성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열쇠이며, 집착은 자기합리화로 이어져 객관성을 상실한채 독선에 빠지게 되는 길이다.
이쯤되면 그나마 작은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어느 하나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한 좌우로 흔들리고,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 기분 좋은 순간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묻고 따지는 수밖에 없다.
내 안에 이 모든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을 나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방법이 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늙다보면 아이가 또 물어볼지도 모른다.
“아빠는 나 때도 그랬어?”
나는 지금 이 선택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차피 인생은 머리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질문에 답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