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ypyo May 14. 2024

방황과 허무 사이에서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https://youtu.be/ZLyvFc2DDNA?si=He4_Z3chN0LjfDMa


밥은 영화 배우다. 2,30년전에 전성기를 누린 후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과거의 영광이 사라진 곳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주름진 그의 웃음은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어딘가 쓸쓸하다.


어느 날 그는 산토리 위스키 광고 출연 제안을 받고 도쿄에 간다. 모든 것이 어색했다. 통역은 낯선 세계에 정착하도록 도움을 준 게 아니라 오히려 불청객으로 만들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 흐른다. 광고 제작 관계자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밥을 대접했지만 오히려 그는 피곤함을 느꼈다. 과한 친절은 상대방에게 해가 된다. 밥은 그들을 피해다녔다.


하루 빨리 도쿄를 벗어나고 싶지만,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크게 나아질 것이 없었다. 한참 잘 나갈 때 만나 결혼한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할 시간이 적었던 아들은 밥을 찾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아이가 태어난 뒤에 가족이란 무대에서 조연으로밀려났기 때문이라고 밥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50대 중년 밥은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세계에 오니 그동안 쌓였던 자신의 문제가 더 명확히 보이는 것 같았다. 삶의 여정 그 한 가운데에서 삭막함을 느꼈다. 외로웠다. 그러나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지금 이러한 상황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기 힘들었다. 이런 고민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밥은 매일 밤 호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신다. 그러다 우연히 샬롯을 만나게 된다.


샬롯은 막 철학과를 졸업하고 사진작가와 결혼했다. 남편 출장길을 따라 도쿄에 왔다. 남편은 매일 바빴고, 패스트푸드 같은 사랑 고백만 반복할 뿐이었다. 대충 만들어진 사랑은 그녀의 허기를 채우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에 휩싸였다. 사랑과 결혼은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결말이 허무한 엔딩의 영화 같았다.


사랑은 시간이 쌓여야 완성된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 바빴고 그녀의 시간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그러다 우연히 밥을 만났다.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차는 상관이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확신은 커졌고, 서로의 빈자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샬롯은 밥에게 자신의 도쿄 친구들과 함께 놀자고 했다. 패션 디자이너, 서퍼 등등 자유분방한 친구들이었다. 샬롯은 밥 그리고 일본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밤을 보낸다. 방황하는 청년들 틈속에 농익은 아저씨의 일탈은 일종의 안도감처럼 느껴졌다. 나는 늙어도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겠구나. 그냥 있는 그대로 잘 살면 되겠구나…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내용이었지만 밥이 있다는 이유로 특별해진 기분이 들었다. 둘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이것이 사랑인가. 지금 내 기분과 상황을 누군가 해석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샬롯과 밥은 생각했다.


둘은 많은 대화를 했다. 오묘한 눈빛을 나누고 차갑고도 뜨거운 말을 주고 받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20대 여성에게 50대 중년 남자는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너무 평범한 거 같다고 말하는 20대 주부에게 50대 영화배우는 그렇게 사는 것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둘은 낯선 세계를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갔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던 두 남여가 일본 도쿄라는 낯선 세계에서 새롭고 특별한 감정을 깨닫게 되는 모습을 그린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한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둘은 사랑했지만 사랑이라는 일반적인 공식을 깬다. 젊은 날의 방황과 중년의 허무 사이에 긴 다리가 놓여 삶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외롭고 고독한 그들에게 탈출구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둘의 외로움과 고독이 오히려 하나의 통로가 되어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가능성이 되었다.


이 모든 장면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감각적인 연출로 담아냈다. 고독과 쓸쓸함을 화려한 도쿄 밤거리에 쏟아내면서 그 색을 더 진하게 드러냈다. 영화 말미에 밥과 샬롯은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과연 밥과 샬롯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도 찾았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포커판을 지배한 엘리트 여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