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흘류도프는 자신의 과거 잘못을 바로 잡고 싶어했다. 한 때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낳고 생활고에 시달려 매춘부가 되어버린 상황을 괴로워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선 그녀를 보고 배심원이었던 그는 좌절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내비친 진심과 고백과 설득이 아니었으면 그녀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것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녀를 돕는 수밖에 없었다.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은 공작이지만 그녀는 하층민이었다. 계급차가 뚜렷했지만 사회적 굴레는 벗어던졌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애정으로 인해 발생된 그릇된 현실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뿐이었다. 작은 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바로 잡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망가진 여인을 보듬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은 웃었다.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네흘류도프의 개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사회 체제에 반하는 행위이기도 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나도 괴로웠다. 과거의 잘못으로 망가진 현실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불행을 유발한 원죄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만큼의 보상과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인가. 책임과 분별의 경계에서 방황하며 깊은 고민에 빠진 나를 계속 마주하게 했다. 나는 그의 어리석음에 분노하거나 그의 정의감에 호응하기도 했다. 나의 잘못과 무책임이 빙글돌아 나를 둘러싼 채 나의 두 손을 잡고 어서 빨리 대답하라고 호소했다.
네흘류도프가 구원하고자 했던 카튜샤는 결국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랑이라는 개념보다는 그에 대한 매력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비해 너무나 훌륭하고 근사한 인물이었고,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다는 것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포기한다. 그녀가 그의 신세를 망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의 호의와 애정이 오롯이 그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괴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녀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정치범과 함께 하기를 결정했다. 그녀는 그와 함께 했을 때 누리게 될 부와 명예, 그리고 깊은 애정 관계로부터 얻게 될 만족감 들을 모두 포기했다. 네흘류도프를 위해서였고, 동시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거두고 네흘류도프가 진심으로 스스로를 위해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로부터 그녀 자신도 자유를 획득하며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네흘류도프는 오랜기간동안 수감된 뒤 시베리아 징역장으로 끌려가는 카튜샤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불의에 저항한 정치범, 누명을 쓰거나 가벼운 죄로 무거운 형을 살게된 불우한 이들로부터 잘못된 현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들을 도우면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상류층의 오만과 환락과 착취로 유지되는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일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기반은 기독교 신앙에 두었다. 그에게 이전에 알았던 성경 속 구절이 새롭게 다가왔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그 시절,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를 통해 다시 신을 찾아 부르짖는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도 벌을 내릴 수도 없다. 이것은 기만이다. 오로지 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올바른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법률이 아니라 도덕과 신의에 있다고 외친다. 종교와 인간성의 회복이 수탈과 착취로 상처입은 세상을 고칠 수 있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 책이 쓰여진지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인간은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옥죄는 중이다. 여전히 세상은 그때로부터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