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무한히 변한다. 그래서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무한의 세계를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란 보편 타당한 특정한 이론을 정립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의 깊은 뜻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고정된 개체는 변화를 감지하거나 그 안에서 적응하지 못한다. 반대로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기만 해도 부질없다. 노를 놓아버린 뱃사공은 방황하는 존재일 뿐, 방향성을 잃고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노를 부여잡고 강을 건너가라고 말한다. 알아야 할 것은 오직 노를 젓는 행위뿐이다. 물길을 읽고 내가 가고자 하는 지혜의 숲을 향해 열심히 건너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이념이나 이론에 갇힌 사람들이 많다. 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한 불의의 사건들을 떠올려 보라. 우리가 지금 보고 듣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들에서 익숙한 결말을 내고자 한다. 이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 세상에 적응해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부정하면 내가 부정된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의 논리다.
반면에 세상을 바꾼 혁명적 사건들은 세상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듣는 것 너머에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품었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배우고 탐구해 나갔다. 결국 새로운 문을 열어 우리를 초대했다. 뒤늦게 합류한 사람들은 그들이 열었던 세상 안에서 적응하느라 바빴고, 또다시 그것을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세상을 움츠리게 했다.
쓰여진 말들은 오용되기 쉽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뿐,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목적을 향해 건너가는 자들이 아닌가? 불교에서도, 최진석 교수의 <건너가는 자>에서도 건너가는 자들의 유형을 굳이 정의하지 않았다. 다만 그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건너가는 목적이 선이든 악이든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건너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건너간 자가 내뱉는 말을 추앙하거나 불변의 진리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공(空)’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허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정의된다. 나 자신은 스스로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성별이나 유전적 기질과 같은 요소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니 철학적 의미에서 독립된 개체의 본질은 없다.
한 사람이 홀로 외로이 있다면 그 자체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만 다른 것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정체성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얽매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 정의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바로 공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내가 공의 개념이 아니라 특정 관념으로 현상을 바라본다면 고통이 시작된다. 그것은 곧 집착이다. 이 집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어째서 나는 집착하는가? 어째서 나는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가?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건너가는 자가 되기 위한 출발점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의 일상과 습관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갑자기 일론 머스크가 떠올랐다. 그는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혁신가다. 한때 그는 진보적인 민주당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정치계와 언론의 탄압을 받자, 이번에는 트럼프 편에 섰고 그 베팅은 성공했다.
서로 욕을 주고받던 관계였던 이들이 이제는 동지가 되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를 머스크의 ‘건너가기’로 해석한다. 그는 꿈이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을 넘어야 한다. 정치는 현실이다. 정치적 족쇄가 그를 붙잡자, 그는 진보와 보수의 기존 개념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만약 그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아젠다에 매몰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