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소파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며칠 전에 아내가 주문한 것 같았다. 제목이 귀여웠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나는 '귀여운'과 '할머니'라는, 나와 절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조합된 제목의 책을 조심스럽게 들추어 훔쳐보다가 어느새 마지막장을 넘기고 있었다. 때는 더운 여름 낮이었고, 음악은 잔잔하게 흘렀으며, 아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아들과 함께 잠들어버린 아내가 방에서 나왔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좋은 책인 것 같네."
옛사람들은 이름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요즘 부모 들은 작명소 등과 같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자식들에게 적절한 운명과 연결시켜주려고 노력한다. 따지고 보면 형태는 달라도 선택하고 싶은 운명이란 것은 대부분 부와 명예로 요약할 수 있었다. 단 두 글자에, 그것도 남의 손을 빌려 그 모두를 꾸역꾸역 몰아넣기를 거부한 이들이 요즘에는 많아져서 다행이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의 이름은 하정이다. 아들을 바랐던 작가의 부모님은 태어난 셋째 딸에게 어떠한 운명과도 이어 주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녀의 이름이 화정이가 아니라 하정이 된 것은 단지, 사투리가 심한 할머니의 발음 때문이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기대한 것보다 더 좋은 일로 다가오기 시작한 이유가 말이다.
우연이 삶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평소 우리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신을 내몰고 그렇게 억지스럽게 일궈낸 결과치를 보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입을 쩍 벌어질만한 성과를 냈거나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한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그냥 지나치기엔 조금은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운이 좋았어요."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잡고 있는 것은 답이 아니다. 언제나 때가 있기 마련이라는 식의 말이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내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는 평소대로 일상을 살아간다. 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삶을 원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올랐던 비행기에서 마주한 그들로부터, 정확하게는 그 새로운 세계로부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워냈기에 새로운 것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작가를 새로운 운명으로 이끈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이 결국 삶을 이끌어가게 된다
'하정 또는 썸머' 작가는 여행을 즐겨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낯선 것은 불편이었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봉사 목적으로 떠난 해외여행은 영원히 기억될 필연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이 책으로 연결되었다.
작가는 그 봉사여행에서 만났던 덴마크 친구에게 그녀의 어머니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덴마크 친구와 그녀의 어머니는 흔쾌히 응한다. 작가는 무작정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그녀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집안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 찍는다.
보석공예를 하는 덴마크 한 가정의 삶은 우리네와 달리 여유와 만족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뜨개질 솜씨와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원하는 것을 적었다던 노트는 감동적이었다. 역동적이고 세상을 움직일 만한 어떤 혁신적인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형식적이지 않은 그 수수함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 작업은 작가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기쁨을 주었다. 이야기는 공간과 사물 곳곳에 새겨져 하나의 역사가 되어 있었고, 그것을 발굴하여 먼지를 털어내고 들여다보는 작업은 '좋아하는 것이 결국 삶을 이끌어가게 된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가만히 바라보면 인생은 참 아름답다."
가볍게 읽을 만한 것이구나 했다가 머릿속에서 이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과연 우리는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서 인생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는 그 순간은 가.만.히 바라볼 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왜 나의 영혼과 몸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닐까. 불필요한 행동이 사라지면 찌꺼기가 가라앉고 세상이 맑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내 가족과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가 생기게 된 것 같아서 흐뭇하게 책을 덮고 아내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동안 쓰지 않았던 카메라를 들어보았다.
모두들 Have a Good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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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인스타그램에 댓글 달았는데, 친히 피드백을 주셔서 반가움에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