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든 어떻게 보는 게 중요하다

경주 여행기

by 랩기표 labkypy

수유가 속해 있는 연주단 가족모임이 경주에 있어 우리는 급하게 1박을 하기로 결정하고 금요일 저녁 경주 황남동으로 출발했다. 밤 아홉 시가 넘어 도착한 소설재라는 한옥 형태로 꾸며진 숙소에 짐을 풀고는 지상이를 재웠다. 늦은 저녁을 밖에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혼자 나가 음식을 사 오기로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리단길이란 새명찰을 달기 전부터 거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황남 닥트, 황남 분식 등과 같은 황남동의 상점들은 젊고 멋진 인테리어로 치장된 거리 사이에 듬성듬성 낡은 간판을 달고 있었다. 어제 봤던 KBS 다큐에서 70~80%는 매년 없어지고 다시 생긴 가게라며 황남동의 황리단길을 걱정하던 문구점 아주머니도 보였다. 그리 낯선 방문도 아니었는데 이제 마감합니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늦은 시간에 경주 거리를 걷는 건 생각해보니 수학여행하면 경주라는 공식이었던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인 것 같다.


음식점은 거의 다 문을 닫은 상태였고, 맞은편 닭강정집과 초밥집은 마지막 주문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몇 번 포장을 거절당하고 이런저런 상점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 결국 어느 젊은 여행객 커플과 나이 많은 동네 아저씨가 자리를 차고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분식집에 들어갔다. 김밥과 순대를 포장하고 나와 마트에 들러 마실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전통문양과 창호지로 꾸며진 작은 창을 통해 화장실 불이 새어 나오게 하여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린 바닥에 그대로 음식을 풀어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제야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안동 고택의 느낌도 들었지만 너무 따뜻한 방과 벽에 달린 작은 티브이가 지금 우리는 요즘 감각을 대표하는 ‘-리단길'에 있으며 최근에 만들어진 숙소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아침이 되자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봄, 아니 여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숙소 앞에 마련된 카페에서 빵과 호박죽을 조식으로 내어준다고 하여 지상을 데리고 갔다. 음식을 받아 두고 마당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지상을 좇아 다녔다. 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방문이 하나 둘 열리면서 여행자들의 들뜬 감정들이 마당에 쏟아졌다. 짧은 휴식을 취하고 우린 모임 장소인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에는 차를 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로 붐볐다. 겹벚꽃과 버드나무들이 여름 같은 햇살과 온기를 품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어서 들어오라 손짓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뛰어 다녔고 우리는 이쁜 배경에 사진을 찍었다.

총무가 공들여 짠 코스에는 솔거 미술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시대 화가인 솔거 이름을 딴 미술관은 '우뚝 솟은'이란 그 뜻처럼 황룡사 구층 목탑을 본 딴 타워가 중심인 공원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유모차를 밀며 오르막길을 올라 미술관에 도착했다. '전통에 묻다'라는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보기 좋은 건물은 승효상 선생님의 작품이었고 둥글게 이어진 칸칸이 나눠진 공간에는 박대성, 이왈종, 황창배, 윤광수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네 화백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먹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전통 재료를 가지고 현대의 감성을 풀어내는 것을 두고 한국 예술이 나아갈 길을 묻는다라는 의미로 보였다. 그중에 특히 눈에 띈 것은 이왈종 화백의 작품이었다. 파스텔톤의 눈길을 확 끄는 중도(中道, middle island)라는 작품이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제주에 머물면서 그린 작품이었다. 어린 왕자 책 표지에서 봤던 작은 둥근 지구에 꽂힌 바오밥 나무 한 그루 같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코스에 마련된 그의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천국과 제주 중에 제주를 택하겠다고 했다. 그 뜻이야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모든 연을 끊고자 내려간 제주에서 20년간 외로움을 극복하고 맞이한 새로운 세계가 그런 기쁨과 감사로 다가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화사하고 아름다운 잎에 새겨 넣었다. 그 인터뷰에서 꽃을 심으면 벌과 나비가 날라온다며 그만큼 환경을 어떻게 꾸미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새삼 나는 나의 화단을 잘 가꾸고 있나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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