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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도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영화] 소공녀

by 랩기표 labkypy

염치도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괜찮은데 너는 왜 불편할까


영화 소공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어느 다리 밑에 텐트를 구해서 머물기로 했다. 겨울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헤매었지만, 두터운 외투를 입고 걸으면 땀이 흐를 정도가 되자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나는 외롭게 태어났고, 외롭게 자랐지만, 외로운 것이 싫지는 않았다. 남들은 어떤 힘이 있어 꾸역꾸역 잘 살아나가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웹툰을 그리는 나의 남자 친구 한솔이만 있으면 괜찮았다. 그런 한솔이는 더 이상 세상과 단절하며 살기는 싫다며 그동안 못 갖춘 세상 살림을 장만하러 저 멀리 사우디로 떠났다. 반년마다 한국으로 온다고 했지만 더 이상 내게 연락할 방법은 없다. 휴대폰도 끊겼기 때문이다.


월세가 오르자, 방을 뺐다. 흰머리가 나지 않도록 먹던 한약 값이 오르자 약을 끊었다. 가끔 문자만 보내던 휴대폰도 기본요금 인상이라는 소식에 그만 쓰기로 했다. 그렇게 얻은 조금의 여유로 위스키와 담배 값 인상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나왔을 때, 1년만 다녔던 대학시절에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리고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들 쉬운 인생은 아니었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냐고 묻던 옛 멤버 들의 모습으로부터 나는 옛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좋아하던 밴드의 음악을 돌려 듣던 그때의 기억을 안고 만났던 그들이었지만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지만 나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동아리 연습실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던 날들처럼. 그래도 그때는 알바비로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셔도 큰 걱정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오히려 공연비로 받은 얼마의 돈들 때문에 조금씩 주머니가 두둑해질 정도였다.


기타리스트 언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언니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경쾌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언니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나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언니는 내게 화를 많이 냈고, 나는 그날 밤 밖으로 나갔다. 그때 언니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염치가 있어야지."


언니는 나보고 염치가 없다고 했다. 나는 내 삶에 익숙했고 한편으로는 좋았다. 직장으로 가사도우미를 선택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나보고 부끄러운 인생이라고 소리쳤다. 월세도 못 내면서 위스키와 담배를 끊지 않았다고 정신을 못 차렸다고 했다. 언니 남편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 밥을 먹이 듯 물을 따르고 고기를 잘라주던 착한 아내의 모습 뒤에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로 인해 불편한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 그렇게 그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밴드시절 언니가 다단계 실패로 힘들어 내게 빌려갔던, 아직도 갚지 않았던 돈 100만 원을 내어 놓으면서 보증금에 보태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받지 않았다. 나는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드럼 치던 막내는 이혼하여 힘들어했다. 집안은 엉망이고 매일 밤 울면서 아침이 되면 밝은 표정으로 출근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 울었다. 키보드 치던 친구는 시댁에 얹혀살면서 온갖 잡일을 다 맡아서 하고 있었다. 얼굴은 푸석했고 말투는 더 거칠어졌고 행동은 물속에 잠긴 듯했다. 친구는 나와 몇 마디 나누며 추억을 곱씹더니 곧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단했던 하루로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어버렸다.



내 이름은 미소다. 위스키와 담배를 좋아한다. 그리고 쓸데없는 것들에 자주 웃는다. 본명은 따로 있지만 그냥 어릴 때부터 미소라고 불렀다. 그러면 왠지 나도 웃고 저들도 웃을 수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참, 웃는 것과 미소는 좀 다른 이야기다.


나는 집이 없다. 그리고 여행 중이다. 누군가 여행이란, 돌아갈 곳이 있어야 즐거운 것이라고 했다. 나의 안식처는 그저 한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개비이다. 그걸로 족하다.


여행 중 느낀 것이 있다면 부족한 것이 많은 세상이란 것이다. 불필요해 보이는 것들이 가득해 오히려 부족해 보였다. 무거운 짐 아래에 눌려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그렇게 남들처럼 사람구실 하며 사는 것 같았다. 사람구실이란, 지인 장례식에 모여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 할 말도 없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청첩장을 받게 되는 그런 것 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