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을 다녀와서
공간이 빚어내는 시간은 누군가의 기억에서 아름답게 그려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기억에 남는 공간들이 삶 속에서 차곡차곡 착실하게 쌓여나갈 때 한편으로 보람되기까지 하다. 그러한 곳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고 때때로 들여다보는 일이 즐거운 것은 그 공간 속에 담겨 있던 아름다운 기억들을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러한 일이 오로지 혼자만의 오락이었는데, 아이와 함께 하면서부터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것,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수고로 되었다. 그것은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살아요"라는 청춘의 오기라기보다는 "우린 괜찮아요"라는 엄마의 수줍은 미소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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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하고 화창한 10월이었다. 거제에서 부산은 한 시간 거리였고, 부산부터 장인 어르신과 함께 한 강원도 원주까지의 거리는 4시간이었다. 그렇게 총 5시간을 쏟아 마련된 방문이었다. 미국에 거주하시는 처 고모 부부께서 한국을 방문하셨고, 결혼 전후로 인사를 드린 적이 없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선 길이었다. 장소는 강원도 원주 오크 밸리. 하룻밤을 즐겁게 보내고 다음 날 식사를 마치고 처 가족 식구들과 헤어진 후 우리는 근처에 있던 뮤지엄 산으로 가기로 했다. 부산 촌놈이 이 멀리 강원도에 올 기회가 적기도 했지만, 평소 좋아하던 안도 타다오 건축물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에 대해 스스로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수유의 제안에 얼른 가자고 보챘고 숙소에서 5분 여 떨어진 산 정상에 위치한 미술관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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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에 들어선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은 밝은 빛깔의 꽃 단지 사이로 길게 뻗어 있었다. 길 옆으로 몽돌을 깔아 두었는데 지상이는 발을 밟으면 소리가 나고 그 느낌이 신기해서인 지 눈을 내려깐 채 따라 걸었다. 입구에 오자 어디선가 본 듯한 빨간색 조형물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빛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라고 어딘가 소개되어 있었고 그를 대표하는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베이지색 벽돌로 된 담을 덮은 담쟁이가 알록달록 단풍이 들어 멋스러웠다.
미술관 개관 시간이 오전 10시였고,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1시경이었는데,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안으로 들어서자 야외 카페에는 남해 다랭이 마을처럼 계단식 논 같은 작은 인공 호수들이 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 화살표를 따라서 전시를 관람했다. 전시는 기획 전시 「낯선 시간의 산책자」와 상설 전시 「한국미술의 산책 V: 추상화」 그리고 종이의 역사와 공예품들이 전시된 「페이퍼 갤러리」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복도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칸칸이 구분된 방들이 아주 좋았다. 안토 타다오의 독특한 중정도 볼 수 있었고, 은은한 빛을 뿜어 내는 듯한 콘크리트 벽이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곧게 쭉 뻗어 나가면서 시선을 갈라놓는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벽을 따라 뛰어가는 지상이를 잡으러 바쁘게 다니다 갑자가 '억' 하는 소리가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눈 앞에는 김환기 작품이 있었다. 김향안이 사랑한 김환기에 대해서 에세이를 적었던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경매 최고가 경신이라는 다소 속된 뉴스를 접하고 그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그의 아내 김향안 에세이를 읽었었다. 이후 그의 작품과 프랑스 파리는 영감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 '무제'가 이곳에 있는지 왜 몰랐던 말인가. 우연한 만남이었기에 그 감동은 실로 어마했다. 눈이 커지고 발이 멈췄다. 그 순간 지상이는 앞으로 달렸고 접근을 막고자 설치된 안전줄이 흐트러지는 순간까지 가서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겨우 10여분. 그렇게 김환기 작품의 첫 만남은 짧고도 굵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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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래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짧은 인연의 아쉬움이 들었고 내가 몰랐던 책을 언급하면 나보다 더 많은 세상을 알고 있는 그에게 묘한 매력을 느꼈다. 다만, 세상 다 살아본 것 같은 유형은 별개였다. 지금은 누군가의 열정과 평생의 서사가 담긴 유무형의 것들을 볼 때면 그것이 나에게 무언의 대화를 걸어오면서 반가운 인연을 만나는 듯한 설렘을 느낀다.
건물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각각의 전시가 마련된 방과 그것을 이어주는 복도와 높게 세워진 벽들을 따라 그런 설레임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돌아 다니다가 다시 들어선 입구에서 퇴장하는 자신을 보았을 때는 묘한 경외감까지 들었다. 처음과 끝은 같지만, 그곳을 통과한 나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된 것 같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단풍잎처럼 물들었다.
•뮤지엄 산은 강원도 원주 오크 밸리에 위치한 곳으로 2005년 안토 타다오가 지은 건축물이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하늘과 마주 닿는 곳, 예술과 통하는 곳,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되었다.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명상관도 있다.
•제임스 터렐관을 가보지 못한 건... 한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