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품은 집

[국내] 거제도 지평집

by 랩기표 labkypy

<지평집> : 지평선이 머무는 집


언젠가 수유에게 링크를 보내면서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거제도 펜션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건축가 이름은 조병수였는데, 소개된 집의 모습이 자연과 더불어 머물기 좋아 보였다. 빈자의 미학을 좋아하고 심플 라이프에 대해서 관심이 많을 때라 언제 시간이 되면 가보자며 약속하고는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러다 이번 여름 마지막 태풍이 지나가는 날, 드디어 기회가 생겨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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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품은 집이라고 불리는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들은 그의 어릴 적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머리가 여물기 전에 봤던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반듯하게 파인 네모난 공간으로 내려가는 관과 그 위에 덮인 빨간색 천 위로 쏟아져 흩어지는 흙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고 한다. 지워지지 않는 어릴 적 기억이 성년이 된 이후 활동의 정점에서도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니, 우리가 마주하는 환경과 그것이 남기는 기억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건축은 땅과 사람을 연구하는 인문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 사람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건축주는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어머니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자 했는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억측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바다 위로 내려앉는 해을 바라보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다양한 사연을 품고 여기저기서 밀려 들어오는 파도같은 손님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기를 바랬던 것 같다. 이처럼 특별한 사연이 스며든 기억을 맛볼 수 있는 공간에서의 체험은 그야말로 값어치 있다.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내는 거제도의 또 다른 섬 가조도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도로와 본 채 지붕의 높이가 같아서 건물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고 사장님께서 미리 주의를 주셨다고 했다. 네비에 도착지점이 가깝다고 나오자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다행히 빼꼼히 고개를 내민 것처럼 작은 언덕 위로 살짝 드러난 콘크리트 지붕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에 내려보니 콘크리트를 호스로 뿌려 한 폭의 산을 그린 수묵화처럼 보이는 벽이 보였다. 집은 노출 콘크리트를 기본으로 나무 계단과 작은 정원으로 꾸며진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채를 중심으로 양 옆에 두 개의 방이 딸린 4인용 숙소가 있었다. 그중 우리가 머물렀던 히노키식 욕조가 달린 건물 앞으로 잔디와 나무로 꾸며진 작은 정원이 있었고 그 위로 돌길을 만들어 바다를 앞으로 두고 네모 형태로 파 내려간 2인용 숙소 여섯 채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본채에 들어가 간단히 설명을 듣고 지정된 건물로 가니 힘들여 밀어야 하는 나무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고 들어가니 작은 마당에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숙소 안 방바닥은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고 깔끔하게 정돈된, 그야말로 넉넉히 잘 비워져 있는 곳이었다. 침대 앞에 마련된 블루투스 스피커(제네바​​)에 듣고 싶은 음악을 연결하고 비바람이 심해져 시기를 놓칠 까 봐 마당에서 준비해온 고기를 재빨리 구웠다.


밤 사이 태풍이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땅 밑으로 들어가 있는 벙커에 머문 것처럼 그 혼란의 시간이 무사히 지나간 것 같았다. 다음 날 돌아가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진 태풍의 흔적이며 복구를 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보니 건축가의 의도대로 땅이 우리를 품어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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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철학이 깃든 공간에 머무는 경험은 특별하다. 그 의도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파고드는 일 또한 값지다. 욕조에 배치된 에이솝(AESOP​)과 싱크대 위의 발뮤다(Balmuda​) 브랜드의 이야기를 담은 브랜드 매거진 B가 테이블에 놓여 있고, 그것을 읽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드립 커피 봉지에 쓰여 있던 헤르만 헤세와 나쓰메 소세끼의 짧은 글 귀는 흔하지 않은 나만의 취향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번 알려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타협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지만 그래서 더 고귀하고 가치 있다는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진한 커피 향과 맛, 친절히 대해주는 사장님의 태도, 돌아가는 길에 싸준 쿠키도 잘 쉬었으니 조심히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잊지 말라는 당부로 느껴졌다.


태풍이 소리 없이 조용히 지나갔던 날이었다.


2019. 9. 7.(토)


사진=지평집 by sta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