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 : 헨리 5세
백년전쟁 : 1066년 노르만 왕국이 영국을 점령하게 되고, 이후 봉건제의 영향으로 영국 왕족이 프랑스 백작 출신이 되자 프랑스 내 영국의 영향이 커졌다. 이후 1328년에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자식 없이 죽자, 그의 누이이자 영국 왕비인 이사밸라가 자신의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후부터 두 국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1337년 결국 영-프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한 세기 동안 이어진다. 이 영화의 배경은 1413년 27세의 나이로 왕이 된 헨리 5세가 아쟁크루 전투(1415년)를 승리로 이끄는 과정이다. 이후 헨리 5세는 36세에 프랑스 원정길에서 병사한다.
"우리 앞에 죽음이 있더라도 두렵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문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다. 영국의 영광을 위해서 싸우다 죽으면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그대의 용맹함을 후대가 배우며 자라날 것이다. 적들은 우리를 업신여긴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 운명은 우리에게 승리라는 선물을 안겨줄 것이다. 칼과 방패를 들고나가자."
어린 왕은 말을 타고 좌우로 돌면서 모두를 독려했다. 부질없는 싸움은 가엾은 목숨만을 희생할 뿐이라며 자신의 아비를 증오했던 과거는 우렁찬 목소리에 묻혔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적들을 물리치지 못하면 내가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죽게 되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키기 위해서 버려야 하고, 싸우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왕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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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은 처음부터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민중의 삶은 고단했지만, 왕은 슬픔이었다. 틀린 것을 틀리지 않은 척해야 하는 슬픔. 자기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는 고통으로부터의 슬픔. 그래서 그는 어릴 적 성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린 왕은 특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선택 또는 이것은 운명이라는 구차함에 이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하루치의 일과 하루치의 걱정 속에서 거짓 없이 살고 싶었다. 아비처럼 권력이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린 왕은 거울 앞에 멈춰 자신을 바라봤다. 그대로인데... 거울 속 나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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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어둡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또 다른 영화 <맥베스>처럼 무거운 음악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어두운 화면 위로 불안하게 흐른다. 초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버지인 병든 왕은 폭정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이익으로 뭉친 집단은 대의보다는 자신의 손해 앞에서 쉬이 흩어졌다. 나의 형을 구해달라. 그렇게는 안 된다. 잃는 것이 많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우리는 그토록 많은 피를 너를 위해 바쳐왔다. 소리치며 일어서는 장남을 나무라듯이 왕에게 사죄하며 물러서는 영주는 결국 왕에게 창을 겨눈다. 병든 왕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형 대신 전쟁에 나선다. 하지만 형은 ‘“전쟁은 안타까운 희생만 남길 뿐”이라며, 병든 왕 앞에서 소리치며 떠난 영주의 아들과 일대일 싸움을 벌인다. 흔한 플롯처럼 감정을 이기지 못하거나 교만한 자의 패배였다. 싸움은 이겼지만 전쟁에서 동생은 죽는다. 방탕하고 야윈 모습이 부랑자 같았던 형이 결국 왕이 된다.
그렇게 죽도록 피하고 싶었던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 어린 철학자는 누구보다 냉철한 왕이 되었다. 깊은 생각과 넓은 시야 그리고 인내와 용기는 왕이 되자 극대화되었다. 늙은 관리들 속에서 그것은 리더십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의 운명처럼 프랑스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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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그들의 전투는 화려하거나 섬세하지 않았다. 서로 마주 보며 몇 마디 나누고 전진하여 고전 무기로 머릿수 대결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때로는 그들을 대표하는 왕이나 왕자가 일대일로 싸워서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 같았다. 어린 왕은 술친구였던 역전의 맹장이 목숨을 걸고 건넨 조언 덕분에 기습 공격으로 불리한 세를 뒤집고 승리를 따낸다.
진흙탕에서 뒹굴며 보이는 대로 찌르고 적의 피로 땅을 적신다. 화면은 가녀린 왕의 처절한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천천히 담는다. 그렇게 얻은 승리는 영국에게 명예를 찾아줬고, 프랑스는 공주를 어린 왕에게 시집을 보내며 굴욕적인 외교 협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전쟁을 이끈 노련한 원로 정치인은 어마어마한 부를 뒷주머니에 채우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속았다.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어린 왕은 분노했다. 아비의 죽음과 동생의 죽음 그리고 나를 여기까지 이끈 그의 따뜻한 손길. 이 모두가 어쩌면 그의 욕망과 거짓과 위선의 결과였다. 창밖에서 울려 퍼지는 민중들의 환호가 옅어지고 그의 눈빛에서 고요한 외침이 퍼져 나왔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치욕의 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또는
이것은 운명이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늙은 여우 같은 노인의 목을 찌른다. 그리고 그의 아내, 프랑스 왕의 딸, 캐서린에게 묻는다.
"나에게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 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