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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영화] 벌새

by 랩기표 labkypy


시대마디 추종하는 가치들이 있었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따르며 살아왔다. 가치 추구를 위해 조직화된 구조에서는 특별한 규율이 필요하게 되고, 개별성보다 군집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로 인해서 개성은 조직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흩어지면 죽는다. 이러한 발상 같은 것이다.

5공시절의 90년대 또한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현듯 소외를 느낀다. 사회적 개인이 독립된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상실감으로부터 절대 진리에 대한 의문이 생기고 모순적인 시스템을 인지하면서 사회가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불확실성과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선택을 하게 된다. 김보라 감독은 영화 <벌새>를 만들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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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 전후로 방앗간 집 딸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그곳에는 밥상머리 교육의 가부장적 가족과 학생 공부기계론을 펼치는 답답한 선생님과 또래의 풋풋한 사랑과 이유 없이 끌리는 동성 간의 우정이 담겨있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별거 없지만 20년도 더 지난 그때 그 시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다.

울컥하기도 하고, 저때는 그랬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영지라는 한문 선생님이 나타나면서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우리는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은희가 아무렇지 않게 오빠가 때린다는 말을 할 때, 영지쌤은 ‘맞지 말고 저항해’라고 한다.


영지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는 장면은 없지만, 여러 암시를 통해 그녀는 부잣집 딸이며 서울대생 마지막 운동권 세대란 걸 알 수 있다. 그녀의 책꽂이에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눈에 띈다. 그녀는 오빠가 때린다는 주인공 소녀 은희의 말에 “맞지 마. 어떻게든 저항해”라는 말을 조곤조곤 건넨다.

이후 은희는 담배를 피우는 한문 선생님의 뒷모습과 그녀의 행동과 말투를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아빠와 담임 선생님의 서울대생은 공부기계라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세상이 정해준 규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저 언니 혹은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새로운 미래를 그린다. 알을 깨는 순간이며 꿈이 생기는 과정이다. 주어진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걸 알게되면서 나도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소녀는 무너진 다리에서 미래를 잃게 된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 피해자 중 영지 선생님도 포함된 것이다. 과거가 미래를 심킨 것 같았다. 현실은 그리 쉽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던 소녀는 다짐한다.

나도 나의 미래를 나 스스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싸울 것이다.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 감독의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만들었다는 것에 유추해 볼 뿐이다. 중요한 건 그녀의 머릿속에는 항상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틀림없이 자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은희네 가족 식사시간은 언제나 밥상머리 교육이 이어진다. 오빠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니 조심해라는 훈계에 오빠한테 맞았다는 막내 딸의 호소는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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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된 것일 뿐이다. 대교가 잘리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했을 때, 그것을 기억하는 방법은 몇몇 대표성을 띄는 영상과 글로써 정의한 역사로 수렴되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보통의 기억들은 각자 나름의 감정으로 이어져왔고 이러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지금 이 시대상 또한 매체나 소수의 의견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각자 특별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표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억압된 사회의 껍데기를 조금이나마 한 꺼풀 벗겨 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시대를 살아왔던가 하며 자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했던가 되돌아보게 할 것이다. 그 부끄러운 행보에서 잠시 비켜서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가치는 무엇이며, 이 사회는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가이다. 현상에만 쫓겨 그 뒤에 숨겨진 진정한 가치를 돌보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거대한 담론을 가져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대신에 나는 이 영화 속에서 과거의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특정한 곳에 멈췄다. 바로 집이다.

25층 아파트 단지와 3층 주택.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던 집들. 마치 언젠가 갚아야 하는 빚더미에 깔린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지금은 다르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머물렀던 곳곳에서 비상식의 최소한의 경계선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영상미도 아주 좋았습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이슈가 된 영화입니다. 몇 개의 김보라 감독 인터뷰를 보았는데, 좋았습니다.


bgm by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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