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타는 눈썰매

무주 덕유산 리조트

by 랩기표 labkypy

무주


매서울 것 같았던 바람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스키와 보드를 탄 사람들이 점점이 박힌 슬로우프 위의 한기를 품고 내려오는 바람만이 얼굴을 세게 때렸다. 눈이라도 먼저 볼까 하여 잠시 발길을 건물 뒤로 돌렸다가 그 바람에 놀래서 얼른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북유럽식풍으로 만들어진 이 숙소의 이름은 오스트리아 북부 지방 명칭을 따서 Tirol이라고 지었다. 배치된 팸플릿이나 엘리베이터 앞에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공중전화를 보니 버텨낸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아늑하고 친근했다. 과거로 돌아간 레트로풍이라기보다는 클래식한 느낌이다. 숙소 내부에 들어서니 벽난로 위에 첼리스트 정명화의 서명이 남겨진 것을 보니 유명인들이 꽤나 들렀던 곳인가 하여 더 반가웠다. 세련된 욕조와 작은 북유럽식 사우나는 그 감성을 더 보태었다.



짐을 풀고 아들의 방한복을 입히는데 아주 힘들었다. 어색한지 계속해서 입기를 거부하며 바닥에 드러눕고 울었다. 달래고 달래 겨우 나왔더니 오후 4시. 썰매를 탈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어차피 추위에 오랫동안 밖에 있으면 아들이 감기에라도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값을 치르고 잠시라도 눈썰매를 타기로 했다. 하지만, 아내가 지갑을 두고 왔고, 등에 땀일 날 정도로 숙소로 다시 뛰어갔다 돌아와 낮은 눈썰매 슬로프에 올라서니 운영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장내 방송이 울러 퍼진다. 어차피 오래 못 탈 것은 알았지만,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을 앞에 태워 아빠 다리를 만들고 품 속에 쏘옥 넣어서 양손으로 꼭 잡았다. 운영자의 신호에 맞춰서 몸을 뒤로 젖히고 내려오니 아주 신났다. 타는 요령을 제대로 몰라서 흰 눈이 우리 앞으로 튀어 올랐다. 동시에 아들은 소리를 질렀고 눈썰매에서 내려서 보니 아들 얼굴에 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양이 우스웠다. “에에에엥” 하고 우는 아이를 달래고 다시 한번 올라갔다. 이번에는 아들이 썰매를 직접 들고 올라갔다. 힘들어 보였는데, 끝까지 끙끙대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이유 없이 대견해 보였다. 눈 위에서 눈을 쳐다보고 만져보고 넘어져서 울기도 하며 순서를 기다리다 다시 출발. 이번에는 더욱 눈이 튀어 올라서 아들은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어 내리려고 하는 정도가 되었다.


“아버님, 발바닥을 들어야 됩니다. 아니면 아드님 얼굴에 다 튀어요.”라며 슬로프 밑에서 기다리던 운영자가 충고해줬다. 몇 시간 동안 서 있었던 모양인지 쌓인 눈 보다 훨씬 더 깊어 보이는 피로에 얼굴이 덮여 있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어서 빨리 들어가라는 보채는 말을 뒤로한 채 우는 아이를 안고 비틀, 눈을 밟고서 다시 대기석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그만 가자고 했고, 나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물과 눈이 범벅이 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아들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들의 첫 눈썰매는 짧고 굵게 끝났다.


+

썰매를 타는 동안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아주 시렸는데, 아이를 안은 순간에는 금세 잊혔다. 아들이 장갑이 벗겨진 손에 눈이 닿아 차갑다며 “아이 아파”할 때 얼른 손을 잡고 입김을 불어주는 기분 또한 새로웠다. 뜨거운 무언가가 잠시 눈과 등과 손끝에서 흘렀다. 참. 별수 없이 나도 한 아이의 아빠인가 보다. 이런 일이 내게도 일어날 것이라 상상을 못 했는데, 이 순간을 아이와 아내와 함께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해가 지고 호텔 주변 조명들이 이쁘게 제몫을 할때, 근처 식당으로 나가 식사를 했다. 아이가 배가 아주 고팠는지 몇 숟갈을 급하게 먹더니 갑자기 두 팔을 벌려 아빠와 엄마를 안는다. 그리고는 왼쪽 오른쪽 뺨을 순서대로 갖다 대면서 뽀뽀해달라고 재촉한다.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