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교황
두 교황
넷플릭스
패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앤서니 홉킨스, 조나단 프라이스 주연
우선,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적기로 함을 밝혀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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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티끌 하나 없어 보이는 화장실 안, 한 노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세면대에 손을 씻으러 다가온다. 먼저 와 있던 다른 노인이 노래가 무엇이냐 묻자 “댄싱퀸입니다”라고 답을 했지만,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는 ‘아바’라는 가수의 노래라고 덧붙인다. 그래도 이해를 못한 노인은 헛웃음과 함께 “아, 그렇군요.”라는 당혹스러운 대답을 남길 뿐이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은 무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오늘날에도 고전으로부터 혜안과 교훈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반증하는 예가 아닐까. 또한, 정치, 종교, 경제, 군사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세속과는 다른 법칙이 적용될 것 같은 교황과 추기경 사이에 벌어지는 이 영화 역시 또 다른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 영화는 신을 모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교황청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특별한 조직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부패 등의 인간의 문제로 골머리 썩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영화의 시작은 진보와 보수라는 가치의 대립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결국 인간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들. 조직과 부패와 개혁과 리더의 이야기였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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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위기 속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선출되었다. 과학과 물질 숭배로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대중들로부터 멀어졌고, 성스캔들과 각종 부패사건은 천주교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조직에 위험을 가져왔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리더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교황은 기도를 통해 신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그는 기본과 원칙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통과 통합을 놓쳤다. 기본과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기준을 세우는 꼴이 되었고, 추기경 중 20%만 이해한다는 라틴어처럼 함부로 넘지 못하는 높은 벽이 되어 고립되고 말았다.
결국 베네딕토 교황은 ‘하나님께서는 이전 교황의 잘못을 새로운 교황이 바로 잡으려고 하신다’는 말을 남기며 교황직을 내려놓는다. 추기경이 어떻게 세속의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까 이해 못했던 교황은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말은 더 이상 조직의 비전과 가치를 이끌어 가기엔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비로소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덜어냄으로써 다시 채울 수 있는 이치다. 또한, 그 가치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할 때의 권력의 무용함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대화였다. 진정성 있는 대화가 사직하고자 했던 프란치스코를 교황의 자리로 돌려 세웠다. 막힌 길이 뚫린 것이다. 대화는 단단한 벽을 무너뜨렸고 그동안 가로막혀 보지 못했던 가치를 발견하게 했으며 포용과 합의를 이루어냈다.
만약 ’문제 해결’이라는 것이, 이해가 아닌 단지 표면적인 타협이거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라면 근본적인 답이 되지 못한다. 어설프게 봉합한 상처는 곪아서 터지고 만다. 서로 다른 두 교황은 인간의 화법으로 대화를 나누다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신의 음성으로 하나가 된다. 완전한 소통과 화합을 이룬 것이다.
우리가 상대를 비난하고 부정하는 것은 어쩌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가치와 이념의 추구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다. 조건 없는 희생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진리 또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특정한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발생되는 갈등은 집단 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승리라는 것은 다툼과 분쟁을 거쳐 획득한 피 묻은 전리품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된다. 진정한 통합과 정책은 그 전쟁의 고리를 끊고 진정한 이해로 돌아서야 가능하다. 과연 우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받아 줄 용기가 있는가.
경쟁이 격해질수록 몸과 맘은 타들어간다. 우리가 상대를 비난하고 부정하는 것은 어쩌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눈을 감고 기도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