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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한반도

[영화] 남산의 부장들

by 랩기표 labkypy

남산의 부장들

욕망의 한반도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


“김 부장, 요즘 섭섭했제. 오늘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서 만든 자리다. 한잔 받아라.” 김 부장은 안경을 바로 만지고 잔을 내민다. “네, 각하.” 구겨진 인상이 어쩐지 불편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모든 장면이 그랬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

막걸리와 사이다. 대학시절에 두통반으로 통하던 그 막걸리와 사이다를 박통은 ‘막사’라고 불렀다. 양철 주전자 주둥이에서 쪼르륵 술이 흘러나오는 소리에 주변이 긴장한다. 키야 맛 좋다는 소리에 살짝 분위기가 풀렸다가 다시 쪼르르 쪼인다.

“각하, 대국적으로 정치를 하십시오.”라고 갑자기 겹겹이 쌓인 긴장을 뚫고 김 부장이 내뱉자 “야, 너 미쳤어!”라고 경호실장이 소리친다. 다시 김 부장이 “넌 인마! 너무 건방져.” 외친 뒤 한발, 탕. “미쳤어! 김 부장!”라고 박통이 소리치자 “각하를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합니다.”라고 엄중히 말한 뒤 또 한발, 탕. 오랫동안 다양한 배우와 설정으로 숱하게 재현된 모습으로 바닥부터 차오르던 스크린 속의 긴장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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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리며 시작한다. 그것부터 이 영화의 메시지가 뚜렷해 보였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일이 있었다니깐 함 들어보시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차근차근 살피고, 뼈 밖에 남지 않은 이야기에 살을 붙여 입에서 입으로 청산유수 좔좔좔 스토리가 전개되면,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왜 또 이 모양 이 꼴인가 물음표만 잔뜩 남기는 것이다.

영화에는 사람으로 보이는 짐승들이 탁 들어앉아 있었다. 들끓는 시민들의 함성을 마치 극장에 앉아 다리 꼬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치부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도 있었다. 남일이었다. 탱크로 밀어버리면 그만이라고 넘기고 자신의 욕망만 배설할 뿐이었다.

또한 지는 해가 있었고, 알 수 없는 내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안으로 똘똘 뭉친 천태만상들이 있었고, 그 뒤에서 팔짱을 끼며 어찌 되나 한번 보자며 키득 웃고 있는 미국이 있었다.

하지만, 민생이 어쩌고 혁명이 어쩌고 라며 말하는 그들의 대의는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왜 혁명을 했습니까라고 묻는 김 부장의 질문과 돌아오지 않은 각하의 대답은 마치 임자 마음대로 해봐라는 식처럼, 역사는 어차피 쓰인 대로 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것을 쓰는 자와 해석하는 자 그리고 관망하는 자와 최종 승리자는 또 누구인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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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는 많다. 어설픈 사실관계만을 나열하거나, 아예 덮어두고 몇몇 어른들의 입을 빌려서 겨우 코끼리 다리만 만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빛을 보지 못한 여러 논문과 기록을 살피기에는 귀찮고 불편하다. 이런 우리에게 역사를 재해석해 픽션으로 꾸민 대중영화는 재미를 넘어선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관심이 생기면 찾아보게 되고, 찾아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하나의 관점이 생긴다. 그것은 내가 아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흥하고 망하는 것의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찰나에 눈을 잠시 돌려 주변을 바라보면 문득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내가 알던 세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웃기지만, 이 어둡고 습한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의 가족이 궁금했다. 김 부장의 부인과 자식은 어땠을까. 박 전 부장은 왜 홀로 외딴 나라에 있을까. 로비스트 데보라 심은 결혼을 했을까. 박통의 딸은 어쩌다가 지금 이 지경이 되었을까. 등등 쓸데없는 질문이 지나갔다. 엊그제 위인을 꿈꾸는 누군가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잘해보자고 했었는데, 어쩌면 권력을 꿈꾸는 자에게는 그보다 더 웃긴 이야기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참으로 멋진 슬로건을 내밀었던 그분의 저녁은 아직도 바쁜 것처럼 그런 달콤한 멜로는 피투성이 누와르 앞에 무너지고 마는 것 같다.

어쨌든 어린 자식을 둔 아빠로서, 욕망이 철철 흘러넘치는 이 계곡 사이를 헤쳐나가는 한 남자로서,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 이 땅 위의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로부터 정의가 새롭게 세워지면 나와 가정이 조금 더 근사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또한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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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개인적으로 스토리, 연출, 영상, 연기, 사운드 등 아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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