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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그으면 경계가 된다

영화 파수꾼

by 랩기표 labky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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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었다.
아버지는 아들 죽음의 흔적을 따라간다.

간단한 플롯으로 이어질 것 같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연출력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울시에서 5천만 원을 지원받아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예산이 부족해 사비를 조금 더 들였다고 밝혔다. 다행이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 준 것에.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 잡은 주인공들의 후광이 만족을 극대화해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연기는 훌륭했다. 배우 이제훈이 이런 역을 저렇게 소화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이 긴장과 스토리를 진하게 이어간 것은 감독의 예술적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긴장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를 담아낸 듯한 디제이 솔스케이프의 음악 또한 백미였다. 영화 대부분은 숨소리와 거친 대사로 채워지지만 간간히 들리는 그의 음악들이 눈과 귀를 넘어 나의 오감을 사로잡고 흔들었다.

그 떨림 위로 주인공 셋의 우정은 각자의 세계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사랑과 우정. 그 짜릿한 추상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가를 목격할 수 있었다. 온갖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타인을 대하고 있을까 곱씹었다.



시간이 뒤죽박죽 엇갈리며 이어지는 장면은 보는 이에게 어떤 임무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동년배를 구타하는 고등학생들과 죽은 아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이 교차되는 것을 보면서 폭력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추측했었다. 이후 퍼즐을 맞추듯 행간의 의미를 부여해야 했고 후반에 기태와 희윤의 이별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영화가 완성되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서툰 감정선으로 경계가 그어졌고 서로가 분별없이 넘나 들면서 전쟁이 벌어지며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계속 이어지는 꼴을 바라볼수록 나는 안타까웠고 마치 화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라도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 몸을 비틀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친구는 서로의 관계에 대해 각자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기대와 다른 현실로부터 오해는 시작된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같은 주관적인 베품은 언제나 배신감으로 돌아오기 십상이다.


중학교 때 약골이었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학교 짱이 된,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기태와 부질없는 것들로부터 지겨워진 동윤 그리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친구라는 개념을 가진 희준이 주인공이다. 이 셋은 방과 후 야구를 하면서 친구로서 지낸다. 그 야구의 의미는 서로가 달랐다. 기태에게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외로움을 극복하는 행위였지만, 나머지 둘은 그 친구의 요청을 받아 준 것뿐이었다. 더욱이 희준이는 리더를 따라 하는 침팬지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렇게 각자 다른 세계는 결국 깨어진다. 누구의 잘못일까. 현실이 구부러뜨린 왜곡된 기태의 성격 탓은 아닐까 속으로 물을 즈음에 희준의 차갑고 독한 모습에 생각을 고쳤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성장하는 이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성장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세계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내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아집은 결국 높은 벽을 쌓고 누구도 넘어올 수 없도록 했다. 후에 아이들이 크면 그것이 부질없는 고집이었다는 것을 알겠지만, 그 시절 그때는 쇠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다.

결국 기태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희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동윤이는 그 사실에 분노한다. 이후 서로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낸다. 기태는 그 간극의 공허함을 대신해 그를 추종하는 무리와 함께 지냈지만 결국 중학교 때부터 가장 친했던 동윤의 집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그냥 가라”라는 말만 들을 뿐이다. “그냥 가라”에 맞춰 고개를 저으며 너까지 그러면 안 된다며 읊조리는 모습이 기태의 마지막이다.



희준은 기태와 관계가 틀어지고 난 뒤에 전학을 간다. 자살한 기태의 아버지가 희준을 찾는다. 그는 아버지께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스스로 속여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윤이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기태 아버지에게 자신이 연락해보겠다고 한다. 기태 또한 동윤이와 전화 연결이 안 되 그의 집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린다. 어렵게 만난 동윤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고개를 숙인 그의 힘없는 말투는 죄책감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런 동윤이를 향해 희준이는 무심하게 기태가 자살하기 전 주고 간 야구공을 전달한다.

“나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좋겠다.”

희준이는 그것으로 기태와 동윤이와의 추억에 안녕을 고했다. 그 모든 기억을 학창 시절 기분 나쁜 추억으로 동봉하여 저 멀리 깊숙이 밀어버린다. 이후에 희준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그리고 사라진 기태와 망가진 동윤이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까.



성숙이란 결국 다름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인 것 같다. 각자의 환경과 성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도 그 경험은 상대적이다. 그 다름을 차별과 분별로 가져가 경계를 그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긍정적인 시너지를 이끌어 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성숙인 것 같다. 성장하는 아이들에게는 너무 박찬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짐을 덜어 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 아닐까.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쉽게 하락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은 성숙하지 못한 자칭 어른들로 가득차 있다.

기태 아버지가 작은 공장의 셧터를 내리면서 잠시 쉰다는 안내글을 붙였다 떼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아들을 잃었지만 공장을 열 수밖에 없는 그 현실의 무게감. 어쩌면 그것이 바로 기태의 죽음을 유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연적으로 방황하고 부서지는 그들의 세계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제목이 왜 파수꾼일까 거듭 고민했다. 아직도 미궁이다.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삶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각자의 방식으로 살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이다. 그 타인과의 경계에 서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 눈을 감기도 하고 눈을 치켜뜨기도 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인 것 같다. 결국 죽어버린 파수꾼은 잃어버린 하나의 세계와 함께 불타 지워지는 쓸쓸함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수꾼을 넘어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초대할 수 있는 용기와 그 용기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성숙이다.


https://youtu.be/Ug3DWcUfi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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