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하린 Jul 09. 2024

움직이는 명상 박스

머리가 꽉 막혀버렸다. 고구마를 한 입에 삼키고 우유를 안 마신 것처럼, 뜨개용 실이 꼬여서 더 이상 손으로는 풀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처럼, 그냥 아주 꽉 막히고 더럽게 꼬여버렸다. 이럴 때는 정말 답답해서 내 머리를 꺼낸 다음에 뇌 주름을 한 올, 한 올 풀어서 일자로 쫙 펴고 싶은 마음이다. 정말, 더럽게 꼬였다.


이럴 때 나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몰라서 끙끙 앓곤 했다. 시간에 여유가 좀 있을 때는 급하게 영화를 예매해서 보러 가기도 했지만, 영화를 보려면 상영시간을 맞춰야 한다. 돈도 들고, 시간도 내가 영화에 맞춰야 해서 이 답답한 상황을 당장에 풀기에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건 며칠 묵은 답답함을 푸는 용도라면, 지금처럼 오늘치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 쓸 방법이 따로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운동을 하러 뛰쳐나가는 것도, 친구와 전화를 하는 것도 있지만, 드라이빙을 한다는 선택지도 있다. 작년까지는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선택지다. 그리고 다른 두 방법과는 다른 독특한 장점이 있다. 이번에는 ‘움직이는 명상 박스’에 대한 소개를 잠깐 해보고자 한다.


 




나는 원래 운전을 매우 싫어했다. 자전거는 꽤 오래 탔지만 왠지 자동차는 운전할 때 그 무게감이 달랐다. 내가 까딱 잘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그 공포. 자전거는 끽해봐야 내 몸무게 절반의 절반도 안 되지만, 자동차는 아무리 못해도 1톤이 넘는 물건이다. 그 책임의 크기가 같을 수가 없지.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한동안은 꼭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부담감을 안고 운전을 하다 보니 금방 피곤해지고, 스트레스만 쌓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운전에 익숙해지고, 내가 신경 써야 할 것만 챙기면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니 운전 중에 음악이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명상을 하는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담감을 벗어던진 후에는 시나브로 드라이빙에 대한 감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는 것들이 줄어들면서 좋은 점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해야겠다.


드라이빙에 익숙해지자 내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거리가 좀 있더라도 인테리어가 아름다운 카페를 찾아가는 것이다. 평소 생활반경이 좁았던 내가 거리의 제약이 줄어들게 되자, 답답한 집에서 벗어나 이상향에 가까운 공간을 찾으러 다니는 모험가가 되었다. 특히나 자연을 좋아하고 쾌적한 야외공간을 선호하기 때문에 자연풍과 산뜻한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위주로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간 카페에서 하루종일 작업을 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 반나절 동안 정 붙인 카페와 이별하기가 아쉬워 바로 집으로 향하질 않는다. 집을 목적지로 찍어두기만 하고,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샛길이 있으면 그 샛길도 들러보고, 내비가 알려주는 길과 다른 엉뚱한 길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어차피 목적지는 집으로 찍혀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다른 곳으로 향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다. 이전까지 드라이브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이유가 ‘목적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마음 놓고 운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집이라는 확실한 종착점이 내비게이션에 찍혀있으니, 그 여정 중에 어딜 가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부담이 사라져 버렸다.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이 단순함이 오히려 자동차를 '움직이는 명상 박스'로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다. 운전의 기본인 전방 주시는 내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덕에 어느 때보다도 깊은 명상이 가능해진다. 차 안에서 나는 오직 운전과 명상, 이 두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틀고, 정해진 방향 없이 그저 운전하다 보면, 노면에서 올라오는 진동과 차량의 엔진소리가 화이트노이즈 역할을 해준다. 눈앞의 풍경은 내 옆으로 휙휙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나는 복잡하게 꼬여있던 머리가 점점 단순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을 만나느라, 일을 하느라 신경 썼던 많은 모든 것들이 운전하는 중에는 의미 없는 것들이 된다. 아무리 운전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안전운전은 생존의 문제이기에 그저 사고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라인을 따라가며 주행한다. 

이런 단순하면서도 중대한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집에 있을 때처럼 도파민으로 꽉 채워진 영상을 보며 시간을 축내지 않게 된다. 노면 상황에만 집중해야 하니, 자연스레 불필요한 자극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내 삶에 딱히 도움도 되질 않는 도파민덩어리들이 멀어지게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끊임없이 도로의 상황과 교류를 하고 있으면서도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해진다. 이 고요 속에서 나와의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샘솟는다. 그것이 일과 관련된 것이든, 혹은 내 앞으로의 삶과 연관된 것이든 평소에는 미처 해보지 못했던 생각들이 파도치며 다가온다. 도사마냥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운전하며 자연스럽게 명상을 통해 내게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의 바쁜 삶 속에서 여유를 찾는 것은 강바닥의 사금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심지어 정말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에도 불필요한 잡념이 나를 진정으로 쉴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항상 시달리며 살게 된다. 전통적인 명상방법을 통해서 잠시 한 호흡 쉬어가는 게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녹음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집중하려 해 봤자, 금방 현실로 튕겨져 나올 뿐이다.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은 오히려 오감이 예민해져서 자잘한 소리도 모두 신경 쓰이고, 간지럽고, 명상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운전은 오감을 한 곳에 강제로 집중시키는 행위이기에, 오히려 더 효과적인 명상 도구가 될 수 있다. 무거운 쇳덩이를 조작하는 막중한 책임감은 불필요한 잡념을 차단하고, 안전운전이라는 제1철칙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러한 집중이 역설적으로 나머지 정신을 자유롭게 하여 깊은 명상 상태로 이끈다. 층간소음 걱정 없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은 채, 외부와 단절된 '움직이는 명상 박스' 안에서 우리는 더욱 자유로운 사고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한 때 운전을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했지만, 운전에 익숙해지고 드라이빙을 즐기게 되면서이제는 운전이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이   있음을 깨달았다. 본인이 차를 가지고 있다면,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를 통해 이 특별한 명상을 경험해 보길 권하고 싶다. 그리고, 차가 꼭 있어야 하는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달리기나 자전거 라이딩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는 하다. 다만 차가 있을때는 이렇게 활용해보는 것도 괜찮다는 의미다.

작가의 이전글 생활 속 UI/UX: 탑뷰 주차와 게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