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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커터!

by 진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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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커터!"

킹오브파이터(이하 킹오파)라는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기술이다. 점프하면서 한 발로는 반달차기, 그리고 반댓발로는 앞으로 올려차기를 하는 무술 동작인데, 최종 보스인 루갈이 구사하는 기술 중 하나다. 태권도 3단이었던 나는 그 캐릭터의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나름 친구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기쁨도 누려볼 수 있었다.

남자아이들에게 게임과 만화, 영화 속 액션 장면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무술 동작의 화려함과 호쾌함, 그리고 단련된 육체에서 나오는 강인함과 멋. 어린 소년이 매혹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한 소재였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 중학교에서는 WWE라는 미국 프로레슬링이 대유행이었다. 어느 반을 들어가도 남자애들 너댓 명은 모여서 덩치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레슬링 기술을 흉내내곤 했다. 나는 또래들 사이에서 유독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치는 '찹'이나 스톤 콜드의 스터너(상대의 목을 잡아 당기면서 주저앉아버리는 기술) 같은 작은 기술들만 구사할 때, 나는 친구들을 들어올려 호쾌한 기술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물론 놀이였기에, 잡아주는 아이들은 항상 있었고, 나 또한 아주 살포시 내려놓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또래들이 그렇듯 스포츠로서의 대결과 감정적인 싸움을 구분하지 못했다. 복싱이나 킥복싱처럼 태권도보다 실전적인 무술들은 결국 '대련'을 해야 했는데, 그게 '싸움'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다. 그건 오로지 '격투기 선수'들만의 영역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경외감을 가지고 동경했을 뿐, 그들의 영역을 직접 체험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어떤 만화에서 본 대사처럼 '동경'은 '이해'에서 가장 먼 감정 중 하나였다. 대상을 동경하는 순간 선입견이 생겨 보고 싶은 모습만 보게 되는 법. 나는 무술의 본질인 '대련'을 '싸움'이라는 편견으로만 바라봤고, 싸움을 무서워하는 내게는 그저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내게 20대 중반, 친구가 킥복싱을 배워보자고 제안했다. 설렘과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다. 태권도를 배우긴 했지만 주먹질은 해본 적 없었고, 뚱뚱한 몸으로는 날렵한 무술을 할 자신이 없었다. 헉헉대며 땀 흘리는 비대한 몸을 누군가 비웃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학창시절에 축구를 못한다고 벤치멤버로 쫓겨났었고, 뚱뚱하다는 것에 대한 놀림을 받았던 기억도 있어서, 나는 불필요할 정도로 겁부터 먹어버렸다. 결국 '살 빼고 도전해볼게'라는 말로 친구의 제안을 둘러댔고, 실제로 킥복싱을 시작하기까지는 1년 남짓한 시간이 더 필요했다.




1년간의 망설임 끝에 도착한 킥복싱장은 내 걱정과는 달리 훨씬 밝고 활발한 분위기였다. 태권도장처럼 애들이 바글바글 거리지는 않았지만, 복싱만화 ‘더 파이팅’에서 봤던 것처럼, 땀내나는 청년들이 살벌한 분위기에서 목숨걸고 훈련만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다양한 나잇대의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건강한 분위기의 운동 공간이었다. 내 또래부터 관장님보다도 나이 많은 중년의 회원까지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는 광경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격투기를 선수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던 내 입장에서 ’저 나이에도 격투기를 수련하는 이유가 뭘까?’하는 의문이 들 때쯤, 나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듣게 되었다.

“와, 회원님 골격이 좋으시네”

“왼손잡이에요? 사우스포는 진짜 귀한데!”

늘 콤플렉스로 여겨왔던 것들에 대한 칭찬폭격이 이어진 것이다.

어릴 적 왼손을 쓴다고 수건으로 손을 묶였던 기억, 짝꿍한테 불결하다며 오른손잡이로 바꾸라고 강요받았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귀하다'고 대접받는 건 처음이었다.

특히 '골격이 좋다'는 말은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크고 투박했던 체격은 늘 놀림거리였다. 헬스장을 다녀 근육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지방에 파묻혀 그저 '뚱뚱한 몸'으로만 보였다. 당시만 해도 마동석이 뜨기 전, 권상우 같은 마른 근육이 이상적인 몸매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볼품없는 돼지가 아니라, 골격이 딱 벌어져서 운동하기 좋은 체격이라니!

그것이 신규회원을 꼬드기기 위한 감언이설이었을지언정, 나를인정해주는 곳에서 굳이 뛰쳐나올 사람 어디 있겠는가? 나를 홀려버린 그 마법의 단어들 때문에 그날부로 체육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7년간을 꾸준히 킥복싱에 매진하게 되었다.


킥복싱장은 내게 있어 단순한 운동공간이 아닌,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관장님이 격주로 여는 단체회식은 엄격한 무도인들의 단합회가 아니라 평범한 동네사람들의 편한 술자리였다. 격투기라는 공통의 취미 앞에서는 나이도, 직업도 모두 무의미했다. 벨라루스에서 이민 온 외국인부터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까지, 평소의 생활반경에서는 마주치기도 힘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20대 초 중반까지 친구들의 끊임없는 술 강요에 질려있었기에 첫 회식 때 꽤나 긴장한채로 참석했었다. 그러나 회원들 중에는 건강을 생각해 일부러 술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었고, 회원의 상당수가 회사의 강제적인 회식에 이미 거부감이 있는 직장인들이었던지라 그 누구도 술을 강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술자리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 더불에 첫날 들었던 의문점도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까지 이곳을 다니는 이유 말이다.

그들은 단순히 무술을 배우러 온 게 아니라,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순수한 열정만으로 모인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려고 이 곳을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 체육관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체육관 사람들과 1박 2일로 여름 물놀이를 갔다올 정도로 친밀해졌다. 이 때 쯤에는 나를 이 체육관에 다니자고 꼬셨던 친구보다도 내가 체육관 사람들과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비록 시간이 흘러 관장님이 코로나 시국에 체육관의 재정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체육 관을 닫게 되었지만, 나는 여기서 알게 된 친구가 결혼식을 할 때 보러 가고, 집들이도 챙겨줄 정도로 든든하고 오래가는 지인들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체육관을 나와서도 자주 운동을 같이하는 태영이라는 친구도 생겼다. 크로스핏 트레이너 출신의 열정 넘치는 동갑내기 친구인데, 더 나이들기 전에 격투기 선수생활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몸을 불사르는 친구다.

나는 원래 격투기 시청만을 즐기는 오타쿠로 시작했지만, 이 친구와 체육관에서 스파링도 하고 격투기 얘기도 자주 나누면서 점점 오타쿠가 아닌 무도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 격투기는 어느새인가 싸움이 아니라 스포츠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강도를 조절하며 기술을 연습하는 스파링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저 동경의 대상으로 여기던 격투기를 점점 이해하려고 했고, 체험의 빈도를 늘려갔다.


태영이가 격투기를 진심으로 하는만큼, 나는 시합출전까지는 못해봤어도 그 친구의 세컨(경기중 링 밖에서 코치해주는 사람)을 봐주거나, 훈련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그 친구를 따라서 레슬링도 해보고, 종합격투기도 체험해볼 수 있었다. 레슬링 체육관에서 나보다 40kg이나 가벼운 국가대표 코치님한테 붙잡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붕붕 날아다녀보거나, 종합격투기 체육관에서 준 프로 선수랑 킥복싱 스파링을 겨뤄본다거나, 복싱장에서 실제 프로선수와 힘을 실은 강도 높은 스파링을 체험해보면서 격투기와 무술의 세계를 그저 눈과 이론만으로 즐기는게 아니라, 온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싸움이 아닌 스포츠로서의 격투기는 정말이지.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리 같겠지만, 맞는게 아파도 그저 재밌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BjySVD2_vY


게다가 재작년에 회사를 퇴사한 뒤에는 내가 즐겨보던 킥복싱 코치가 운영하던 채널에 직접 메일을 보내서, 해당 코치와 스파링을 하는 컨텐츠를 촬영하기도 했다. 덕분에 처음으로 유튜브에 출연도 해보고, 오랫동안 즐겨 온 운동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는 뿌듯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촬영장소가 내가 10년 넘도록 단 한 주도 빼먹지 않고 구준히 챙겨보는 UFC의 메인 해설인 ‘김대환 해설’이 운영하는 체육관이었던지라, 직접 김대환 해설을 만나 궁금한 것도 여쭤보고, 직접 대련도 해보면서 ‘성공한 덕후’로서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싸인도 받아놓을 걸 그랬다.


작년, 한국 최고의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약해 온 정찬성 선수의 은퇴경기를 보기 위해 홀로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먼저 예능으로 진출해 얼굴을 알린 김동현 선수가 한국인 최초 UFC선수라면, 정찬성 선수는 최초로 타이틀전까지 치룬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존경해왔던 선수와 마지막 경기를 치뤘고, 장렬하게 KO패배를 했다. 정찬성 선수를 쓰러뜨린 승자 맥스 할로웨이 선수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할만도 한데, 정찬성 선수의 위대함과 투지를 칭송하는걸로 자신의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정찬성 선수가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글러브를 내려놓는 순간, 관중석의 모든 이들이 그의 등장곡을 떼창하기 시작했다. 코리안 좀비의 고별무대는 그렇게 장엄하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때 한창 방황하고 있었다. 이 경기를 보기 1년 전, 스파링 컨텐츠 촬영 직후 발목 수술을 받았고, 격한 운동을 피해야만 했다. 격투기와의 거리는 자연스레 멀어져갔다. 매주 UFC 경기를 보는 것이 그저 관성이 되어버린 듯했고, 이대로 격투기와 권태기를 겪다가 헤어지는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정찬성 선수의 은퇴 경기는 내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숙소로 돌아와 은퇴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사람의 꿈을 향한 마지막 도전의 순간이 그토록 찬란하구나. 발목 부상 때문에 미련을 버리려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결국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떼어내려 해도, 격투기는 영원히 내 삶의 한 부분일 것이라는 걸.




얼마 전 '흑백요리사'라는 예능에서는 만화를 보면서 요리를 독학했다는 '만찢남' 셰프가 나왔다. 보통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깊이 빠진 사람을 '오타쿠'나 '덕후'라고 부르며 놀리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자신이 본 만화 속 요리에 매료되어 그것을 현실에서 재현해내더니, 결국 실력 있는 셰프가 된 것이다. 오타쿠들이 흔히들 하는 말로 ‘성공한 덕후’가 된 것이다. 만찢남 셰프의 방송분량을 더 챙겨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내적인 친밀감이 느껴졌다.

나도 한때는 무술만화와 게임 속 기술들을 그저 동경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직접 체득하고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고등학생 때 ‘더 파이팅’이라는 복싱만화를 보면서, 복싱의 세계를 동경했던 소년은, 지금은 웹툰을 그리는 친구에게 무술 동작을 실제 재연해보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태영이라는 친구를 도와 시합에서 세컨을 봐주기도 하고, 다음 경기를 대비해 분석을 돕기도 한다.

학창시절만 해도 운동이라곤 게임기 들고 손가락 운동하는 게 전부였던 내가, 킥복싱을 만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저 TV로만 보던 선수들의 동작을 하나둘 따라할 수 있게 되면서, 동경했던 그 세계와 하나가 되는 걸 체감할 수 있었고, 동경은 점차 이해와 사랑으로 변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던데, 나는 이성 대신 격투기에 먼저 사랑을 느낀 것 같다. 어릴 적 태권도장에서 루갈의 제노사이드 커터를 따라하다 넘어지던 꼬마가, 이제는 실제로 그 기술을 구사하는 무도가가 됐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이게 그 결과인가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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