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못할 호기심을 창작을 위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 승화하기까지
나는 어려서부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호기심이 넘쳤다.
궁금한게 떠오르면 일단 그자리에서 해결을 봐야만 하는
일명 '물음표 살인마' 같은 아이였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 사람들은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눈치문화 때문에 질문하는게 서투르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게, 어린 시절 학교에서부터 이미 질문하는 것에 대한 압박을 받으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교실에서는 배운 것 이상을 알고 싶어하는 질문자가 ‘모난 돌’ 취급을 받았고, 선생들은 권위적인 태도로 학생의 탐구심을 찍어눌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위축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학교에서는 더 이상 지식을 탐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내 호기심은 꺾이지 않았고, 미처 해소하지 못한 호기심들은 집 안으로 향했다. 아버지께서 엔지니어 출신이셨기에 "핵융합과 핵분열은 뭐가 달라요?", “왜 사람들은 열에너지, 위치에너지를 모두 전기에너지로 바꿔서 써요?”처럼 쉽게 풀어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도, 최대한 성의껏 내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질문’을 통해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잘못을 저지르는게 아니라는 가치관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설명해주실 수는 없었고, 결국 나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책과 인터넷에 조금 일찍 빠져들었다.
내 호기심은 너무나도 넓고 방대했기 때문에 한 우물을 파는 데 서툴렀다. 물리, 생물, 공학, 천문, 역사, 인문, …그리고 예술과 대중문화까지. 모든 게 궁금했다.
특히 ‘과학동아’라는 잡지가 내 호기심을 키우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아무래도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닌 잡지였기 때문에 설명이 어렵지 않았고, 초등학생인 나조차도 흥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레벨로 쉽게쉽게 설명이 되어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계속 과학과 관련된 저서를 읽으며 내 상상력과 호기심을 충족해왔고, 나는 결국 학자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멋모르던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어떻게든 이 흥미롭고 놀라운 세상의 비밀을 파헤쳐보고자 곤충학자, 천체물리학자 같은 과학자를 꿈꿨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관심사가 더 많아지면서 나라는 사람은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더 넓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SF영화나 판타지소설에 흠뻑 빠져들며 '나는 진실을 끝까지 탐구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보다는 이 흥미로운 진실들을 토대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라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 많은 관심사를 한데 모아 표현해볼 수 있는 길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답을 ‘글쓰기’와 ‘미술’에서 찾았다.
내가 작가가 되어 에세이나 소설로 다채로운 정보를 엮어낸다면, 굳이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여러 분야를 간접적으로나마 깊숙이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가진 끊임없는 호기심과 상상력. 이것이 바로 내 창작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록 한 분야에 끈덕지게 집중할 순 없어도, 여러 분야에서 가져 온 지식과 아이디어를 상상력과 잘 버무려내면 오히려 창작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떠한 판타지나 SF도 완전히 순수한 창작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창작이란 마치 건물을 세우는 일과 같아서, 현실의 물리법칙과 기존의 문화적 배경이라는 단단한 뼈대 위에 자기만의 살을 붙여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 신화와 성경에서 모티브를 차용했으며, 이후 등장한 수많은 판타지 작품들은 반대로 《반지의 제왕》이 정립한 엘프, 드워프, 오크의 이미지를 거의 공식처럼 답습했다.
스타워즈의 제다이 철학은 불교와 선(禪) 사상에서, 《듄》은 아랍 독립을 위해 싸웠던 T.E로렌스의 저서 ‘지혜의 7기둥(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사이버펑크 장르는 80년대 일본 경제 급성장에 대한 공포와 해커 문화에서 태어났다. 이처럼 모든 창작물은 기존의 문화적 자양분을 흡수하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해석을 덧씌우며 성장해나간다.
창작자는 마치 베틀을 짜는 직조공처럼, 씨실과 날실(과거의 이야기, 역사, 문화, 철학, 과학)을 엮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같은 실을 사용하더라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패턴을 짜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직물이 탄생하듯이, 창작 역시 기존의 재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엮어가며 변화하고 확장해 나간다.
실제로 성공한 판타지나 SF작품들은 마치 작품 속 세계가 실제로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아주 디테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아바타에 나오는 '할렐루야 산맥’이 대표적인데, 거대한 바위섬이 지구와 비슷한 중력을 가진 판도라섬의 대기중에 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언옵테늄이라고 불리는 상온 초전도체가 판도라 행성의 강력한 자기장과 상호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하는 설정으로 보완했듯이 말이다.
설명 없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상상력에 현실의 과학 원리를 살짝 끼워 넣으면 "자성에 의해 섬이 뜨는 거군!" 하고 독자들은 자연스레 납득하게 된다. 이런 감초 같은 장치들이 SF를 읽는 이들의 의문을 희석하고,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탁월한 역할을 한다.
그러고보면 나 또한 과거에 만들었던 게임에서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역사를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만들던 게임의 무대가 '스팀펑크와 디젤펑크'라는 시대적 배경 위에 지어졌기에, 증기기관에서 디젤기관으로 넘어가던 그 시기의 문화상을 다방면에서 파고들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의 복식과 장신구는 물론, 인쇄물에 사용된 폰트와 색상까지 세세하게 연구했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완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팀펑크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산업혁명 시대의 시각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대사나 나레이션을 통해서 ‘인간의 목숨이 가볍게 여겨지던 시대'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프로파간다 포스터나 시커먼 매연을 뿜어내는 굴뚝, 획일화된 노동자들의 복장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거리 풍경, 그리고 기계 장치들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성 상실'이라는 메시지를 웅변적으로 전달했다.
이렇게 시대적 맥락과 일관성이 맞아떨어지는 시각적 요소들은, 긴 설명 없이도 게임 속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앞서 말했던 것 처럼 호기심을 토대로 쌓은 풍부한 지식은 대체로 좋은 것이지만, 반대로 나는 호기심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 보니 늘 문제가 있었다.
정말 탐욕스럽게 글을 읽고 재미있는 설정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지만, 그중 살아남는 지식은 100분의 1이나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은 내가 지식을 온전히 흡수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보통은 금방 흥미를 잃고 또 다른 새로운 지식을 찾아 떠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위키백과류, 그 중에서도 나무위키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거의 반 폐인이 되기도 했었다. A라는 지식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서브지식들. a, b, c 중에 c가 뭔지 모르겠으면 새 탭에 c를 연다. A를 다 읽고 c로 갔다가 이번에는 i, ii, iii를 또 찾게 된다. 여기서 또 i와 iii를 찾고 z, x, c로 타고 넘어간다... 게다가 발견한 지식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궁금증이 고개를 들면, 또다시 새로운 검색의 여정이 시작되곤 했다.
이 끝없는 지식의 함정에 빠져 어느새 충혈된 눈으로 시간을 버리고 있는 나를 인지했을 땐, 캄캄한 새벽이 되어있곤 했다. 지식 탐독의 악순환 속에서 그저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아 좌절감이 쌓이는 일도 잦았다.
그러던 중 2024년 9월, ChatGPT의 'Advanced Voice Mode'를 만났다. 처음에는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 다른 사람들이 쓰듯이 개인적인 고민을 물어보거나, 하소연을 하는 등의 정서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했다. 마치 영화 Her에서 주인공이 AI 사만다와 나누는 대화처럼 말이다.
https://news.nate.com/view/20241203n25411
하지만 아무래도 인공지능에게 정서적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내 성격상 그다지 내키진 않았다. GPT가 썩 괜찮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해도 결국은 사람이 아니라 AI아니던가? 내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AI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정서적인 영역보다는 지식 같은 이성적인 영역이었다. 그말인 즉, ‘실용적인 용도’로 쓰는 것을 말한다.
다만, 채팅으로 하는 GPT 활용이 익숙해져 있던 나였기에, 대화형 AI활용에 적응하는게 곤혹스럽긴 했다. Advanced Voice Mode가 나오기 전까지 내가 GPT를 사용할 때는, 이전 화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GPT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내가 묻고 싶은 분야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다음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제안하고는 했다. 그렇게 문장을 구성하면 아주 양질의 답변이 나오긴 했으나, 이걸 ‘음성 대화’에서 구현하는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대화'가 '글 쓰기'와 다른 점 중 하나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점점 선명해진다는 것이라는걸 깨닫고는, 굳이 한 번에 모든걸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내가 정말 해결하고 싶은 것을 묻는게 아니라 조금 가벼운 질문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본격적인 일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거고, 음성대화를 쓴다는 것은 보통은 손을 쓰기 힘든 상황일 때니까, 문제해결 보다는 당장의 호기심을 해결하거나 업무 관련 지식을 모으는데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GPT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 나는 마치 나무위키에서 여러 탭을 열어가며 정신없이 검색하던 습관을 대화로 옮긴 것처럼,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예를들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라고 가볍게 운을 띄우면 GPT가 "영화의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으신가요? 장르나 감독, 배우에 관련된 이야기인가요?"라는 식으로 받았다. 그러면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좋아하는 페르소나는 누가 있지?"라는 식으로 받아서 배우와 관련된 질문으로 넘어가고, 또 그 배우가 출연한 작품에 대해서 알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내가 불분명하게 알고 있던 영역이 점점 선명해지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호기심도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Advanced Voice Mode를 활용한 GPT와의 대화가 나무위키를 탐독할 때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식의 정리 방식에 있었다. 나무위키에서는 '나중에 읽어야지'하며 수많은 탭을 열어두곤 했지만, GPT와의 대화에서는 실시간으로 호기심이 해소되었다.
특히 어떤 개념에 대해 모호한 이해만 있을 때도, 지속적인 질문과 답변을 통해 그 개념을 구체화하고 미처 몰랐던 디테일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눈으로 읽을 필요가 없어 짜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에서 파편화된 정보들이 하나의 맥락 있는 지식으로 정리되면서, 내 생각도 함께 발전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쌓인 지식들은 단순한 축적을 넘어, 앞으로 내가 쓸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디자인 작업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갔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무한한 호기심'은 분명 양날의 검이었다.
나무위키에서 수많은 탭을 열어두고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처럼, 호기심이 너무 많아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하는 산만함은 큰 약점이었다. 이런 습관 때문에 대부분의 지식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늘 한계를 느꼈다. 하지만 이런 약점도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엮어 창작의 밑거름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로는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내가 게임을 만들 때 스팀펑크 세계관을 묘사하기 위해 산업혁명기의 문화상을 아트 스타일에 녹여내서 설득력을 강화했듯이, 폭넓은 호기심으로 얻은 지식들은 내 창작물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이제는 AI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만나, 이'호기심의 양날'을 더욱 효과적으로 달루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던지지만, 실시간 대화를 통해 즉각적으로 해소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전과는 달리 흡수하지도 못한 지식들을 나중에 먹으려고 쟁여놓던 나쁜 습관이 사라졌다.
음성대화도 자주 사용하다보니 이제는 나름의 루틴이 생겼다. 이동시간이나 설거지처럼 '낭비'로 여겨지던 순간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운전할 때는 전방주시 의무 때문에 스마트폰을 볼 수 없지만, 귀는 열려 있고 말도 할 수 있다. 전에는 이 순간이 너무 지루해서 라디오를 듣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며 보냈는데, 이제는 GPT와 대화를 나누며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집에 와서 대화내용을 정리한다. 또한 설거지나 집 청소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손은 바쁘지만, 음성으로 질문하고 답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창작을 위한 밑거름을 쌓는데 활용할 수 있다.
지난 몇 개월간 AI와 함께하며 발견한 이러한 활용법들은 내 창작 활동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동안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손과 눈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상황에서도 AI 음성 대화가 어떻게 '짜투리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주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활용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려 한다.
이미 AI를 통해 얻은 수많은 인사이트들이 내 창작의 폭을 넓혀주었지만, 이제는 그 경험을 다른 창작자들과 나누며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