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시선’이라는 왜곡된 거울에 대하여.
v 15. 225
사람들은 거울인 척 나를 비춘다. 하지만 그들의 거울은 볼록하거나 오목하게 왜곡되어 있다. 내게서 보고 싶은 부분만 확대하고, 보기 싫은 부분은 축소한다.
'이게 네 진짜 모습이야'라는 거짓말과 함께.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1부에서 다룬 '쓸모없어짐'에 대한 공포의 근원에는 어쩌면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브스턴스》와 《미지의 서울》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혹은 자신을 찾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시선이 사람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들 중 대부분은 왜곡되고 거짓된 시선이다. 심지어 그 시선이 어떠한 ‘의도’를 품게 된다면, 객관성은 사라지고 남을 조종하는 악의로 변하게 된다. 미지의 서울에서는 집단이 악의를 가지고 시선을 보낼 때, 사람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미지의 서울》에서 미래가 내부 고발자인 선배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직장내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모습은, 집단의 폭력이 가진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집단에 방해가 되면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개인을 격리시키고 괴롭힌다. '절대 다수의 시선'이 개인을 말려죽이려 든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과거 학창시절에 당했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나 또한 집단과 시스템에게 짓뭉게진 나약한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뚱뚱하다고, 오타쿠라고, 남들에게 피해 한 번 준 적 없지만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시작된 따돌림. 나는 선생님들에게 피해 사실을 호소했지만 "가해자보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오히려 “네가 애들을 괴롭혔으면 괴롭히지, 누가 널 괴롭히니?”라며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집단이 개인을 바라보는 방식은 맹목적이고 불투명하다. 선생님 혹은 회사. 단지 위에 있는 누군가가 '나는 너를 악으로 보기로 했어'라고 규정하는 순간, 집단 내 모든 구성원은 의심없이 지침을 따를 뿐이다. 자신의 눈을 통해서 보는게 아니라, 그저 위에서 만들어준 필터에 맞춰 선악구도를 정해놓고 볼 뿐이다.
미래 또한 회사에서 '꽃뱀'으로 보기로 정했기에 그녀를 두둔하거나 제대로 관찰하는 이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미래를 집단 린치하는 대부분의 직원은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적이 없음에도, 미래를 추행한 박상영 수석의 여론전에 말려든다. 동료직원 중 누구도 박상영을 의심하지 않고, 미래를 힐난하기 바쁘다. 단 한 명도 그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거나 한 적이 없음에도.
이렇듯 타인의 평가는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서사일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사람들의 평가에 점점 깎여나가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된다. 자존감은 곤두박질치고, 가학적인 평가의 칼날 위에 스스로 올라가 난도질 당한다.
그리고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라고 자학하기에 이른다.
나 또한 내 읍소를 들어주지 않는 선생들을 보자 더 이상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고, 그저 ‘나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더더욱 순종적인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따돌림을 당하고 뒤에서 놀림을 당해도 그저 허허 웃으며 속만 문드러져 가다가 우울증에 걸렸지만,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집단의 폭력 앞에 무너진 채로 ‘내가 잘못했어. 내가 태어난 게 죄야’라고 속삭이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타인의 평가에 오래 노출되면, 그것은 서서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처음에는 '저 사람들이 나를 저렇게 본다'는 외부의 시선이었다가, 어느새 '나는 저런 사람이다'라는 내 자신에 대한 판단으로 변질된다. 가장 무서운 것은, 타인이 없는 곳에서조차 그들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가 동창 프레드와의 저녁 약속을 앞두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는 장면이 그것을 보여준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마친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름답게 볼 수 없다. 평소에는 신경쓰지도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창밖 빌보드에 걸린 자신의 다른 몸, '수'의 섹시한 이미지를 보자 불안감은 증폭된다. 젊고 탄력있는, 주름하나 없는 아름다운 육체. 그녀는 거울로 돌아가 화장을 재정비하고, 스카프로 목주름을 덮는다. 그러다 현관 손잡이의 왜곡된 반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진다. 결국 그녀는 화장을 지우고 방으로 돌아가며 데이트를 취소한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방송국매니저인 '하비'가 씌운 필터가 씌워져있다. 하비가 화장실에서 떠든 '젊고 섹시한 여자를 찾아야해. 그 늙은 여자가 아직도 뻗대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가!'라는 대사가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오염시켜버린 것이다.
아무리 거울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도, ‘늙고 추한’ 자신의 모습만이 비쳐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판단하기 시작했고, 이제 자기혐오에 빠진 눈으로 스스로를 검열할 뿐이다.
《미지의 서울》의 미지 역시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해, 자신뿐 아니라 관계마저 배신하기에 이른다. 미지는 어릴 적부터 말썽꾸러기였고, 미래와 비교당하며 자랐다. 그런 미지에게 달리기는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친구들도, 심지어 자신의 1호 팬이라던 지윤까지도, 모두 그 '반짝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미지는 믿으며 자랐다.
그래서 부상으로 달리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미지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긴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인간관계를 단절한다. 시간이 흘러 미지가 미래의 역할을 대신해 서울로 올라왔을 때, 그녀는 동창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서 미지는 자신에 대한 동창들의 뒷담화를 직접 듣는다. 동창들은 그녀를 미래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미지 본인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을 쏟아낸다.
"미지 걔는 육상 그만두고 뭐 하고 살아?"
"저번에 두손리 가서 보니까 마트에서 짐 나르던데."
"아냐 아냐, 울 엄마 말로는 청소일 한다던데?"
"뭘 어떻게 돼? 망한 거지… 한국대도 물 건너갔다던데?"
자신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인물이 미래가 아닌 미지 본인인지 모르고 내려진 평가들은 잔혹하다. 미지의 생각대로 그녀에게서 '반짝임'이 사라지자, 친구였던 이들은 모두 돌변하여 그녀의 뒷담화를 즐긴다.
미지는 그 말들을 들으며 오래도록 자신이 믿어왔던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역시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네. 달리기를 못 하게 된 순간, 나를 바라보던 모든 시선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라고. 그리고 미지는 자신의 ‘1호 팬’을 자처했던 지윤마저도 그 다수 속에 포함시켜 버린다. 지윤도 분명 자신을 이렇게 봤을 거라고, 실망했을 거라고 단정 지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미지는 지윤을 경계했다. 서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도, 과거의 기억 때문에 친해지기를 거부했다. 반면 지윤은 미지를 '미래'로 착각한 상태였기에, 학창 시절부터 지녔던 학벌 콤플렉스와 경쟁심으로 견제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오해한 채 어색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지는 지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된다.
지윤 - 미지 너를 이렇게 만나네. 계속 궁금했었어. 근데 네가 나 싫어하니까 연락 안 했어.
미지 - 내가 너를 왜 싫어해?
지윤 - 네가 나 대놓고 피했잖아 옛날에.
미지 - 그건 그냥... 네가 나한테 실망한 거 같아서.
지윤 - 야, 나 너 1호 팬이야. 실망을 왜 하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진짜.
미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윤은 달리기를 못 하게 된 미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실망한 적도 없었다. 동창회에서 들었던 대다수의 뒷담화가 모두의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지는 그 시선을 내면화해, 지윤마저도 자신을 그렇게 볼 거라고 혼자 착각했던 것이다.
타인의 평가에 오래 노출되면, 우리는 그 평가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엘리자베스는 '늙으면 가치가 없다'는 시선을 내면화해 거울 앞에서 무너졌고, 미지는 '달리기를 못 하면 가치가 없다'는 시선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내면화된 시선이 실제로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마저 적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타인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시선은 이미 내 안에 자리 잡아 나 자신을 오해하게 만들고, 소중한 관계마저 배신하게 만든다.
엘리자베스가 끝끝내 프레드를 만나러 나가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고 미지가 지윤을 오해했던 것처럼.
나 또한 엘리자베스, 미래, 미지와 다를 게 없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평범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들의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날카로운 시선에 깎여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믿기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의존했다.
마치 서브스턴스 시술을 받은 엘리자베스처럼, 내 추하고 못난 모습을 감추고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나를 무자비하게 깎아나가는 날카로운 시선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마치 스스로 도마 위에 오르는 생선처럼 굴었다. 내 자아가 토막토막 썰려나가도 감수하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인간이 되었고, 본인을 위한 가치평가를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평생 모든 관계에서 을을 자처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남들은 내 눈치 따위 보지 않겠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도 나는 여전히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던 찐따였고, 스스로를 사회의 불순물이라 여겼다.
그 덕에 나는, 나를 좋게 봐주는 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무시하고 살아갔다. 애써 무시했기에 모든 것이 기억나진 않아도, 누군가는 ‘지윤’처럼 나의 1호 팬이 되어주기도 했을 것이고, 프레드처럼 ‘여전히 넌 멋있구나’라고 생각해 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들의 좋은 말을 그저 ‘내 초라한 삶을 위로하기 위해 애써 지어낸 빈말’로 여기며 살아갔다. 어쩌면 그들은 진심이 가 닿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작년에서야 남들도 나를 존중하고 눈치를 보기도 하며, 존중할 줄도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나와의 대화, 그리고 20년 지기 친구와의 대화에서 그들이 나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고 다니는지, 내가 과거의 힘든 일을 딛고 일어서서 지금까지 잘 살아와준 것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분명 그들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나 스스로가 본인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본인들의 진심이 내 안까지 가 닿지 않음을 느끼며 힘들다고 했다.
단지 다수 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긍정하고 좋게 봐주는 시선은 깡그리 무시한 채, 다수의 무자비하고 왜곡된 시선만을 진실로 받아들여 온 나를 향한 하소연이었다.
나는 정말 지독하게도 사람들을 오해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윤을 오해한 미지처럼.
눈치의 본질, 그리고 고장 난 사회
눈치를 본다는 것은 사회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동물이 서로에게 불편감을 주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긴 하다. 하지만 눈치 보는 것이 당연시되면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무너진다.
요즘 우리 사회는 착한 사람에게는 가식 떤다고 눈치 주고, 성실한 사람에게는 무식하다고 눈치 주고, 서툰 사람에게는 답답하다고 눈치를 주며, 아픈 사람에게는 나약하다고 눈치를 준다. 이쯤되면 타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아닌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나는 너를 위해서 하는 조언이야'라고 하면서 사람을 말려죽이는 선의의 악마들이 차고 넘친다.
그렇기에 눈치를 보게 만드는 이 사회의 구조가 뭔가 심각하게 고장 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저 자신답게 살아가기만 해도 비판과 힐난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온전히 자신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생길리 만무하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와 수는 결국 타인의 시선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나이가 든다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다가, 결국 괴물로 변해버렸다. 반면 《미지의 서울》의 미지, 미래, 호수는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쉽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조금씩 자유를 얻어간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미지의 서울》은 망가진 사람들을 응원하지만, 현실에서 망가진 사람을 기꺼이 선호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남들이 나를 규정하지 못하도록 살아가려고 한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