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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린 Feb 21. 2024

숲 속에 나 홀로


“어우씨, 도가니 다 닳겠네”


무거운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온 내 거친 숨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숲 속에 있는 캠핑사이트는 고요하고 한적하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팀 단위로 와서 파쇄석이 깔린 자리에 텐트를 다닥다닥 붙여 설치하기 때문에 이런 외진 곳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덕분에 고요함을 즐기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 외떨어진 자리가 최적이다. 그래서 짐을 들고 오르내리느라 다리가 아프고, 땀을 뻘뻘 흘려도 굳이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이런 불편한 자리를 고를 수밖에 없다.

솔로 캠핑을 한 지도 어언 3년. 나는 1박 2일 동안 어떤 사람과도 교류를 하지 않는 이 명상과도 같은 시간에 홀리듯이 빠져들었다. 그저 숲 속의 산들바람을 마시고,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를 음악 삼아 들으며, 한 없이 나태하게 늘어져있다. 나도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함께하는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기적으로 나 혼자만 즐긴다. 내가 사회생활을 위해서 착용한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순간이니까.

정글에 사는 타잔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타인을 대할 때 본인을 감추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나 또한 많은 것들을 감추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 예의 있어 보이기 위해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거나, 기분이 나쁜 일이 생겨도 감정을 감추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혹시라도 누가 날 보고 기분이 나빠질까 봐 외모가 지저분해지지는 않았는지 신경을 써왔다. 그러나 이 가면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유지비용이 들고, 정신이라는 재화는 서서히 고갈되어 간다.

나는 나름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에 맞지 않게 소심한 천성 때문에 많은 것을 눌러 삭히며 살아간다. 그 때문에 종종 즉석에서 자기 기분을 표현하고 푸는 데 능숙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삭혀놓은 감정들이 썩어서 바스러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해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직장동료는 물론이거니와 친구와 가족조차도 없는 것이 가장 좋다. 마치 고요한 숲 속에서 낙엽이 썩어 부엽토가 되듯, 감정의 낙엽들을 청소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숲 속에서 감정을 가라앉히고, 삭혀서, 부엽토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회사생활 하면서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슬슬 버거워지는 때가 오면 나는 어김없이 캠핑장을 검색한다. 보통은 2주 후의 토요일을 노리고 예약하는데, 예약을 완료하는 순간부터는 무채색의 건조한 직장인의 삶이 무지갯빛으로 이염되기 시작한다. 설레는 기분이 일상을 물들이는 것이다.

예약한 주에는 별다른 할 것이 없지만 그다음 주인 캠핑 주간이 되면 수요일부터 하루하루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캠핑장에서 사 먹을 통고기를 주문하고, 목요일에는 미리 옷가지들과 캠핑용품들을 정리해 놓으며, 금요일은 퇴근하자마자 마트로 달려가서 고기랑 같이 먹을 다른 식재료들과 숯을 사 온다. 평소 같으면 집에 들어가서 대충 게임이나 몇 시간 하다가 엎어져 잠들었을 텐데, 캠핑 주간의 나는 다른 사람처럼 부지런해진다. 마지막으로 캠핑 당일 점심을 먹을 곳과 캠핑장까지 가는 경로를 확인한 뒤, 소풍날을 앞둔 열두 살짜리 꼬마처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잠에 든다. 


캠핑 당일이 되면, 나는 삼십 대 지친 직장인에서 장난기 가득한 소년으로 변신한다. 오늘은 어떻게 빈둥거려야 잘 쉬었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날까?






캠핑장에서 하는 일과는 매우 단순하다.

열심히 텐트를 치면서 땀을 빼고 바로 샤워를 한다. 아직 오후 3시쯤이지만, 가을의 숲 속에선 시원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온다. 양쪽으로 뻥 뚫린 텐트에서 바람은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한 번 바람이 오갈 때마다 내 머릿속의 잡념들을 한 개씩 가져가는 듯하다. 캠핑체어에 눕듯이 기대어 앉은 채로 캠핑장 매점에서 사 온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는 나태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한량 그 자체다. 

직장인은 누구나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있고, 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정말로 퇴사해 버리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그저 캠핑장에서 보내는 시간만큼이라도 철저하게 백수처럼 보내려고 노력한다. 캠핑을 하지 않던 예전 같으면 주말에도 디자인을 수정해 달라느니, 최종 시안에서 무얼 추가하고 싶다느니 하는 무리한 요구들이 꿀맛 같은 휴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겠지만, 지금처럼 캠핑하러 나와있으면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태하고 나른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과자를 다 먹으면 슬슬 낮잠 잘 준비를 한다. 에어매트에 바람을 넣고, 갈아입을 옷가지를 넣은  주머니를 베개처럼 베고 누워 바람을 맞다 보면, 어느새 모든 잡념이 다 사라져 잠에 빠져든다. 사무실 에어컨 바람은 시리도록 파고드는 날카로운 냉기 때문에 계속 맞고 있기가 힘든데,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나 부드럽고 상냥한지 침낭을 덮지 않고 맞아도 불편함 없이 잠들 수가 있다.

그렇게 잠이 들어 누워있다 보면 굳이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뜨이게 되는 순간이 온다. 숲의 기온은 생각보다 빨리 떨어지고, 일부러 바람을 느끼기 위해 침낭을 덮지도 않고 자다 보니 슬슬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어 잠이 달아난다. 게으르게 눈을 떠 모기장 건너편의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가 뉘엿뉘엿 기울며 하늘에 금실로 수를 놓는 광경이 보인다. 분명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봐왔던 노을인데, 왠지 여기서 보는 노을은 햇살 한 가닥 한 가닥의 질감마저 섬세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이럴 때는 누군가와 같이 감상하고 심경을 공유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그 생각을 거둔다. 옆에 있는 그 사람에게 집중력을 빼앗겨, 이 섬세한 감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서다. 때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독차지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이 순간을 만끽한다.


캠핑장에서 찍은 사진은 아니다만, 순간을 너무 즐기느라 캠핑장에서 찍은 괜찮은 노을사진이 적다.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제주도에서 캠핑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햇살이 산 너머로 금실을 모두 거두어 버리면, 뒤따라온 어둠이 하늘을 뒤덮으며 캠핑장의 저녁이 시작된다. 그리고 캠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바베큐 파티가 시작되는데, 개인적으로 캠핑장에서의 바베큐는 고기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까지는 아닐지언정 가장 낭만 있게 먹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는 연기 때문에 숯을 사용할 수도 없고, 뒤처리도 상당히 귀찮지만, 캠핑장에서는 야외의 탁 트인 공간으로 연기가 빠져나가고 숯을 버리는 곳도 따로 있어서 번거로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게다가 숯이 불을 머금으면서 서서히 백화 되어 갈 때 나오는 은은한 붉은빛을 느긋하게 앉아서 바라본다거나,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이 소리가 풀벌레와 소쩍새가 우는 은은한 소리와 어우러진 하모니를 감상하는 것까지 전부 다 캠핑 바베큐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숲 속에 녹아들어서 느긋하게 즐기는 바베큐라니, 이런 낭만이 어디 또 있겠는가?

 

고기가 다 익고 나면 나는 어둑해진 숲을 바라보며 콜라를 따른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탄산의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숯 향이 배어든 삼겹살은 씹는 순간 짜릿할 정도로 촉촉하고 뜨거운 육즙을 뿜어낸다. 고기를 통으로 구워 수분 낭비를 줄인 덕분이다. 대화상대가 없으니 한 입, 한 입이 허투루 씹히는 일이 없다. 혀는 말을 하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맛을 느끼는 데 집중하고, 나는 꼴에 미식가가 된 것처럼 고기를 음미한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딴죽을 걸만한데, 고기조차도 소믈리에처럼 음미하는 사람이 대체 왜 술 대신 콜라를 마시냐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안타깝게도 난 알코올에 취약하다. 게다가 쓴맛을 싫어해서 입맛에 맞는 술도 찾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이런 좋은 것을 맨 정신으로 즐겨야지 굳이 몽롱한 상태에서 집중을 빼앗겨야 하나 싶기도 하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또렷하게 살아있는 감각만이 이 순간을 최고의 해상도로 즐기게 해 줄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든다.





바베큐를 정리하고 책을 읽으며 쉬다 보니 어느새 밤바람은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산속에서는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낮에는 침낭 없이 잘 수 있지만, 밤에는 얘기가 다르다. 에어매트 위에 침낭을 올리고 그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 불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다. 풀벌레 소리와 소쩍새 소리는 바베큐를 할 때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기는 이 모든 공간을 잠재우려는 듯, 바람 한 점 없이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싼다.

어둑어둑한 텐트 안에서 숲 속의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도 홀로 오롯이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눈을 감는다.



사실 추울 때는 아예 캠핑 자체를 잘 하지 않아서 불멍을 많이 즐기지는 않지만, 한 번 보기시작하면 한 없이 빠져든다. 이번 글에 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불멍의 매력도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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