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약물치료 이야기가 나왔다. 집중력이 낮다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 지시를 자주 놓치고, 경청하는 게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약을 처방받았다.
발달센터를 드나들던 시간에도 굴곡과 절망은 많았지만, 약물치료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날 밤, 약 봉투를 손에 쥐고 남편과 오래 이야기했다. 먹일까? 말까? 선택의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전문의에게 다 묻지 못한 궁금증을 카페 글로 메웠다. 식욕이 뚝 끊겼다는 말, 밤마다 눈이 말똥 하다는 말, 좋다는 이야기와 좋지 않은 이야기가 뒤엉켜 있었다. 나는 화면을 넘기지 못한 채 멈춰버렸다. 알약 하나가 작은 아이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자세히 모른다는 게 나는 두려웠다.
약 처방을 받은 다음 날이 내 생일이었다. 약 봉투를 서랍 마지막 칸에 넣었다. 일단 어딘가에 가서 숨부터 고르기로 했다.
제주는 초여름에도 바다 냄새가 짙었다. 파도 소리를 따라 한담 바닷길을 걸었다. 해가 기울며 어두워졌고, 숙소로 가는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호출 앱은 응답이 없었고, 발만 동동 굴렀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연락했으나 돌아온 말은 도와줄 수 없다는 거였다. 30분 거리였지만, 제주에서는 그 길이 아득했다. 제주 돌담 사이로 스며든 밤은 유난히 캄캄했다.
망설이다 낮에 만났던 기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서귀포에 있다며 망설이던 목소리에서도 달려와 주겠다고 하셨다.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40분이 지나 택시 불빛이 보였고, 차에 올라탔으나 몸은 쉽게 기대지 못하고, 허리는 곧게 세워졌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 시트에 밴 귤 향, 오디오 안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차 안은 따뜻했으나 택시에 몸을 맡기는 일은 언제나 서툴렸다.
갑자기 기사님이 불쑥 물었다. “밥은 먹었어요?” 단순한 물음에,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털어놓았다. 숙소로 향하던 길, 기사님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잠시 들르자고 했다. 밤 11시, 낯선 제안이었다. 택시는 달렸고, 네이버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숙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두려움이 스쳤다. 사방의 가로등까지 꺼져 택시 안은 더 깊이 어둠이 밀려왔다. 교회 앞에 도착해서야 남편한테 내 위치를 문자로 보냈다.
교회 문은 잠기지 않았는지 벌컥 문이 열렸고, 기사님은 라면을 끓이자며 전기 스위치를 더듬어 찾았다. 불이 켜지자 예배당과 예수상이 보였다.
라면 두 그릇과 초코파이 다섯 개, 작은 초 하나가 식탁 위에 올랐다. 허기와 긴장이 풀리며, 부엌 창 너머 예배당 불빛이 조용히 번졌다.
나는 그녀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자녀 공부이야기를 나누었다.
“순풍산부인과 미달이 편이었는데... 미달이가 받아쓰기를 빵점 받아오자 엄마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주며 공부를 시켜요. 달고나를 만들기 위해 설탕을 달구고, 밥 위에 회를 올려 초밥을 만들고,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는 방 안에서 솜사탕 기계를 돌리죠. 그다음 날, 아이는 100점을 받아오고, 엄마와 아이는 부둥켜안고 울어요. 그 장면에 이 노래가 나와요.”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양희은의 '상록수' 노래를 틀었다.
우리 나아가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루리라.
“저는 혼자 삼 남매를 키웠어요. 형편 때문에 학원은 못 보냈죠.”
기사님이 노래를 끄며 말을 이어갔다.
“초등 때까지는 제가 가르쳤어요. 퇴근하자마자 ‘숙제만 하자’가 입에 붙고, 한 명씩 책상 앞으로 데려오다 거실에서 쓰러지듯 잠든 날이 많았어요. 힘들었죠. 그럴 때마다 그 ‘미달이’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나는 정성을 다하고 있나, 스스로 묻고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어요.”
기사님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한 번은 막내한테 시계를 가르치는데 도무지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처음엔 아이 탓을 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더 쉽게 말하지 못한 건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 뒤로는 입으로만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종이컵을 굴리고, 바둑알을 세웠죠. 미달이 엄마처럼요. 그리고 이 노래를 매일 들었죠.”
나는 슬프게도 알았다. 기사님 아이들과 내 아이의 상황이 같지 않다는 것을. 기사님의 아이들은 엄마가 “숙제 하자” 하면 투덜대면서도 스스로 공부를 했을 것이다. 난 기사님께 내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직장을 휴직하고 모든 나날이 느린 아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 학교에서 받아쓰기가 있는 날이면 일주일 전부터 머리가 저려온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결국 함께 울다 잠들던 밤이 이어진다고. 말도 엉성한 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가, 교실에서 어떤 표정으로 있을지 상상하며 식탁에 머리를 쿵쿵 박는다는. 그런 내 일상을 말하지 못하고 기사님이 끓어주신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제주 여행에서 택시 기사님과의 인연은 별똥별이 하늘을 스치듯 짧았지만 선명했다. 기나긴 밤을 지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내가 미달이 엄마처럼 정성을 쏟고 있는지 돌아볼 것 같았다
말이 늦으니 언어치료를, 대화가 부자연스러우니 사회성 치료를, 대소근육 발달을 위해 수영과 인라인스케이트를, 인지가 더디다는 이유로 인지치료까지 시작했다. 수업은 하나씩 늘어났다. 학교에서 받아쓰기와 수학시험을 보는 날에는 책상에 붙잡아두고 가르치다 답답하면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발달센터에서 일대일 수업비로 일주일에 몇십만 원을 쏟아부으면서도, 초등 저학년까지만 버티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는 ‘부주의’였다. 그 서늘하고 가벼운 '부주의'가 아이를 잠식하고 있었는데, 부모는 그저 느리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돌아와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범이야, 뭐 하고 있어?”
“엄마 아직 데두야? 엄마 언제 와”
“데두 아니고, 제주야.”
“엄마, 나 받아쓰기 100점 맞았어.”
“아가야 진짜? 고마워. 범이 선물이 제일 귀해.”
전화를 끊고 뭉근히 눈물이 차올라 객실 방 창문을 열었다. 고르르 고르르 모래알 굴려 다니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루리라.”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