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오후 센터로 향하는 길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흰 옹심이처럼 동글동글, 우수수 쏟아졌습니다. 차갑고 무거운 우박이 아이의 머리카락과 살갗을 긋고 지나갔고, 아이는 종종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게 뭐야?"
분명히 기쁘고 신기한 얼굴이었습니다. 입술을 다문 채 우박을 바라보는 아이를 나는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엄마 이게 뭐야? 얼음이야?"
"눈 같은 거야. 빨리 와. 이제 곧 수업시간이야."
"엄마 나 이것 만져보고 싶어."
아이의 부탁에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 사이로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몇 분 사이에 아스팔트 바닥에 우박이 지천으로 깔렸고, 커피숍에서 한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발치에 얼음을 밟기도, 주저앉아 하얀 알갱이를 줍기도 했습니다. 저도 우박을 몇 알 집어들었습니다. 손바닥에서 우박은 쉽사리 녹지 않고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그 거리에서의 풍경, 소리, 온도를 아이와 찬찬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언어센터를 향했습니다. 이미 수업시각에서 15분이나 늦었습니다.
아이를 교실에 밀어 넣고 지친 몸으로 소파에 흐물흐물 앉았습니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숨이 쉬어졌습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엄마들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습니다. 상담실 문이 열릴 때마다 붉어진 눈으로 나오는 엄마, 검사지를 손에 쥐고 앉아 있는 엄마, 핸드폰으로 '언어지연' '경계성 지능' 'ADHD'를 검색하는 엄마...
엄마의 절박함을 감지하여 더욱 불안해진 아이들은 수업을 거부하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난처해진 엄마들은 자녀를 안아 올리고, 가방 속 과자를 쥐여주며 서둘러 언어교실로 들어갑니다.
나 역시 그녀들과 다름없었고, 어쩌면 더 심했는지도 모릅니다.
대기실에 머무르는 엄마들은 서로 아는 척은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밀어내지도 않는 관계를 두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 오래 다니셨어요?"
조금은 발랄한 목소리로 누군가 내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아니요."
"혹시 장애인 바우처로 다니시는 거예요?"
"아니요."
"그럼 학원처럼 다니시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실망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아이는 소파에서 방방 뛰어다녔고, 의미 없는 단어들을 내뱉으면서 입술을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발달센터를 몇 년 다녀보니 장애인 바우처와 일반 바우처 사이의 간극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엄마의 실망도. 장애 판정을 받은 아이와 받지 못한 아이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
장애인 바우처를 받는 엄마들은 내게서 같은 무게를 찾을 수 없었고, 나는 그들의 슬픔 곁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바우처로 발달센터를 다니는 엄마에게도 슬픔은 다른 모양으로 있습니다. 장애가 아니라는 안도감, 그럼에도 발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조그만 더 자라면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 한 해씩 뒤로 밀려나는 기대들...
수업이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한 시간 전, 우박이 떨어지던 그 하늘이었죠. 구름 속에서 얼음이 된 물은 무게를 견디지 못해 흩어졌고, 가벼운 물은 빛에 닿아 색을 남겼습니다.
나와 아이에게 이 시간은 무엇일까요? 창백한 우박이 덮인 거리에 아이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나는 망설일 시간이 없어 아이의 보폭을 재촉했습니다. 지금은 먹구름 사이로 빛이 스며든 무지개를 보며 아이와 팔을 흔들며 웃었습니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당신 가슴 안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저도 질문을 안은 채 이 시간을 살아보려 합니다. 서늘하게 우박이 되는 시간도, 일곱 가지 빛을 품고 시간도 있겠지요.
느리게 성장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시간을 버티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이 시간을 건너갑니다. 답을 쥐지 않은 채로.
아이의 시간이 여전히 불안한 날에도 부모인 우리는 조용히,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