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정신이 아닌 거지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외국 역시 누군가를 믿고 꺼낸 내 속 얘기가 나를 공격하는 화살로 돌아오는 '앗 뜨거!' 경험을 여러 번 당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대부분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이거나 유달리 친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처음으로 외국살이를 시작한 캐나다에서 그 몇 안 되던 한국인 친구 중 한 명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다. 여러 나라 회사에 다니며 정말 친했던 외국인 동료에게도 괘씸한 일도 몇 번 겪었다. 하야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라는 말은 전 세계에 통용된다.
외국에서 23년을 살았으니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하지 않고 도움의 손을 뻗어도 다들 바쁘게 사느라 그들도 나를 신경 써줄 여력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고 나니 어느 순간 나는 자연스레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고 도움을 요청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했다. 고생을 더 많이 하고 적게 하고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싫었고 거절을 당하는 건 더 싫었다.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혼자 해결 못 할 일은 사실 별로 없었다.
힘들 때마다 다행히도 내 곁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응원해준 지인들이 있었고, 가족들이 있었다. 내 속 얘기를 풀어내도 누구 하나 그 얘기를 이용해 나의 약점으로 작용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기나긴 힘든 통로를 뚫고 나와 기운을 차린 남편도 내 감정을 세심하게 감싸주고 위로를 해주었다. 매번 답답함을 느끼거나 갑자기 화가 날 일이 있을 테면 한국에 계신 엄마 아빠한테 전화할 수 있었고 담담히 들어주셨다. 친언니, 남동생 모두 내 힘든 상황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무기력함은 몇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을 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는 게 어때?"
"이미 병원 돌이 하고 왔잖아. 허리 디스크 재발도 MRI 찍고 물리치료하고 있고, 눈에 생긴 단순 포진 각막염도 항생제랑 안약으로 병원에서 얘기한 대로 잘 투약하고 있는데? 편두통이 심한 건 내일 예약되어 있어."
"그 병원 말고 감정을 검사해보는 건 어때? 핀란드는 정신과가 굉장히 오픈되어 있어."
"아….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나는 잠시 합죽이가 되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들쑥날쑥하면서 난 바로 답을 하지는 못했다. 몇십 초 만에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왜, 내가 미친 것 같아?" 남편도 몇 초간 멈춘다.
"지금 네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사실 요새 너 같지 않은 말과 행동이 잦아졌어. 걱정돼서 제안해 보는 거니까 가지 않아도 되겠다 싶으면 가지마.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니까."
이 대화가 오간 뒤 나는 며칠 동안 생각에 잠겼다. 연애 4년 결혼 15년, 총 19년을 함께한 우리이고 나를 가장 가까이 옆에서 봐온 그는 빈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보건센터에 전화했고 (핀란드에서는 첫 번째 진료가 전화로 이뤄진다. 간호사는 전화 진료를 바탕으로 당장 치료를 할 것인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료할 것인지 결정한다), 여러 가지 질의응답을 한 후 의사를 만나기 전 특별 간호사와의 예약이 바로 잡혔다. 일반 진료는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이상 몇 주를 두고 예약이 잡히는 편인데 이번엔 진료 진행이 빨랐다.
특별 간호사와 만나 내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 내가 당황스러웠다. 특별 간호사는 차분하게 내 이야기에 동감을 해주기도 고개를 끄덕여 주기도 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특별 간호사는 눈물 콧물 대방출해내는 나에게 얘기를 들으면서도 휴지를 건네주기 바빴다. 그 와중에 나는 '그냥 휴지통을 나한테 다 주지, 서로 불편한데 왜 한 장씩 준데'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난 제정신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우울증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해서 바로 그다음 날 예약 없이 우울증 검사를 받으러 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정신 응급 센터'를 방문했다. 이곳은 예약 없이 자신의 우울증 상태를 점검할 수 있고, 또 대화가 필요하다면 바로 방문할 수 있는 시설로 당연히 무료다. 핀란드는 전 국민에게 무상 의료가 시행된다.
또다시 1시간의 내 눈물 콧물 쏟아냄을 하고 우울증 테스트를 했다. 울음이 막 나오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A4 용지 7장 앞뒤로 한가득 있는 질문들에 답변하는 것이었다. 주로 생활방식과 감정에 대한 질의였다. 잠을 잘 자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불면증은 없는지, 식욕에 관한 확인으로 먹는 양의 변화라던가, 얼마나 잘 챙겨 먹나, 평소보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의욕은 어떤지, 성욕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15분 정도 답변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결과를 알려 준다. 극심한 우울증이라고 했다. 보통 9점에서 12점 정도가 일반 사람이 받는 점수라면 나는 32점이 나왔다고 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서도 별 감정이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거부를 했음이 틀림없다. 확실히 내게 문제가 있었다. 난 그저 내가 평소보다 입맛이 많이 없을 뿐이고, 평소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온종일 피곤할 뿐이고, 평소보다 의욕이 좀 없을 뿐이라 여겼다. 힘든 일을 겪었으니 그러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쉬이 여겼다. 내가 원래 내 모습과 정반대로 살고 있은 지 4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나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던 거다.
결과는 시스템에 입력이 되어 바로 의사에게 전달이 되고 다음 날 드디어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갔다. 예약 당시에는 여자 선생님으로 되어있었다. 5분 일찍 병원에 도착해서 의사 선생님 성함이 적혀있는 진료실 앞에서 기다렸다. 칼같이 정확한 시간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복도 끝쯤 있는 문이 열리고 밀가루처럼 하얀 얼굴에, 금발 머리,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파란 눈이 보였다. 너무나 전형적인 핀란드인,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을 것 같이 꽤 어려 보이는 선생님이었다. 그 순간 내 기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어려 보이잖아. 나는 좀 더 연륜 있는 의사 선생님을 원했다고!'
의자에 앉자마자 선생님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난 이 한마디에 무장해제가 되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특별 간호사를 만났을 때와 응급 정신 센터 간호사를 만났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마구 솟아 나오는 폭포 같은 눈물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자기 앞에 놓인 휴지 박스 전체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이 작은 행동마저도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내 울음소리는 꺽 꺽 헐떡이는 울음으로 변했고 주저리주저리 말은 했지만, 의사는 분명 내 말을 정확히 못 알아들었을 확률이 높다. 30분쯤 후에는 훌쩍훌쩍 콧물을 들이켜는 정도의 단계로 내려왔다.
난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항상 나를 단련시켰다. 한국을 처음 떠나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되도록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정보를 모으고, 그에 맞춰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독립심 하나는 제대로 몸으로 배웠다. 부작용으로는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빠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인주의적으로 변했다. 부작용으로 협동심이 모자랐다. 외국에 오래 생활하며 생긴 또 다른 능력은 감정 자제력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겼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이 부작용으로는 감정 표출이 무뎌지고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해질 틈이 없었다. 꾹 참고 달려들어, 될 때까지 악바리처럼 해결해 내고야 말았다. 그랬던 내가 외국 생활한 지난 22년 동안 누구에게도 해보지 않았던 말을 했다. 내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말이었다.
"네. 너무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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