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빠졌던 내 인생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느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우쭐대는 꼴볼견들의 치욕을,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을, 재판의 지연을, 관리의 불손을, 선의의 인간들이 악당들로부터 받고 견디는 수많은 모욕을 어찌 참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_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Hamlet 3막 1장
정신과 의사를 만난 건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앞서 얘기한 대로 꺼이꺼이 서러움에 북받쳐 우느라 말하다 울고 말하다 목 놓아 울고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해낼 재간이 없었다. 속에 쌓인 억눌린 감정이 많이 살아 나왔다. 두 번째도 역시나 눈물 한 바가지 쏟아내긴 했지만, 첫 번째만큼은 아니었다. 의사는 내 일상생활에 관해서 물어봤다. "저녁에 잠은 잘 자요?" 그럼 나는 "딱히 잘 자는 것도 잘 못 자는 것 같지 않아요. 수면 시간이 보통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돼요." 의사는 내게 "왜 그렇게 수면량이 적어요?"라고 물었다. "그런가요? 이렇게 지내는지 벌써 3년이 훨씬 넘었는데요. 사업을 하면서 할 일이 너무 많고, 제 사업이 싱가포르에 있어서 시차 때문에 데드라인을 맞추다 보니 그렇게 습관이 생겼네요. 근데 예전에는 그렇게 힘든지 몰랐는데 항상 피곤해요. 온종일 기운이 없고 다 귀찮아요. “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사업 관련 일 처리를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오전 오후 다시 회사 직원들과 미팅을 하고 마케팅이나 SNS 관련 작업을 했다. 오후 4시 반쯤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다. 몇 시간 아이와 같이 놀고 저녁 식사를 한 뒤 아이를 재우고 나면 저녁 9시부터 또 회사 일에 매진했다. 자정이 다 될 때쯤 에너지 소진으로 기절했다. 또 다음날이 시작된다. 그런 생활을 한 지 3년이 넘어 거의 4년째가 되어 갔다. 성냥불이 다 타들어가 손에 닿일듯 말듯할 만큼만 내가 타들어간 상태로 오래 버텼다.
세 번째가 돼서야 나는 의사와 사람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두 번을 상담하면서 내 몸 안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올 수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다.
" 지금 줄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게 뭐예요? “
" 글쎄요. 너무 많은데. 너무 지쳤어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삶의 의욕이 별로 없어요. 음식만 보면 신나서 먹던 모습도 사라진 지 오래고 뭘 먹어도 맛이 없어요. 운동을 생활화했었는데 지금은 운동을 못 하고 병원에 치료받으러 다녀요. 디스크 재발로 물리치료도 받고, 예민할 때마다 생기는 눈 헤르페스로 항생제 먹고 있고. 온몸이 아프네요. 기운도 없고. 추가로 지금 여기에 정신과 치료받으려고 오고요. “
" 자세하게 얘기해보세요. 어떤 원인제공이 된 사건들이 있었나요? 아니면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그런 것 같아요?"
" 많은 일이 있었죠. 그것도 전부 한꺼번에.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2015년 11월부터 제 주얼리 리테일 사업을 싱가포르에서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디자이너로 12년 동안 여러 나라에서 일했고 회사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원하는 것을 하고 즐기면서 경제적으로도 편한 생활을 했어요. 회사를 설립하고 운이 좋아 첫해부터 3억이 훨씬 넘는 쾌거를 이뤘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동업자와의 의견 충돌로 지난 3년 간이 너무 힘겹고 잦은 싸움으로도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었죠. 회사 상황이 너무 나빠지니 본인도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동의 없이 그냥 떠나버린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
"정말 그랬겠네요. 지금은 좀 어때요?"
" 사실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를 않아요. 2018년 11월이었으니까 벌써 1년 반이 넘은 일인데도 여전히 원망스럽고, 화가 나고, 괘씸하기도 하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혼자 이 짓거리를 하나 싶기도 하고. 당시 회사 운영과 관리를 하던 동업자가 떠나고 회사에 1억 정도 빚이 있고 회사 잔고가 바닥이 난 걸 알게 되었죠. 제 샵들이 백화점에 입점이 되어있었는데 빚 독촉 전화를 매일 받았어요. 전에 이런 경험을 한반도 겪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전화벨만 울리면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가슴이 쩍 하고 벌어지는 경험을 빚을 다 갚아낼 때까지 여러 번 했어요. 처음엔 사업 파트너도 힘들었겠다 했어요. 근데 그건 그거고 용서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전 혼자 남겨진 것이 너무나 겁나고 외로웠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비참히 버림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네요. 그 후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는 디자인과 마케팅 및 크리에이티 다이렉팅 영역을 담당했기에 1년 중 싱가포르 출장을 3, 4번 정도 해도 되었지만, 동업자가 없어지니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나마 코로나 19 이전에는 핀란드에서 싱가포르에 가서 이벤트도 하고 팝업샵도 열고 했죠. 근데 2019년 1월부터는 아예 싱가포르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핀란드에서 전화로 회사 운영을 해야 했어요. 정말 필요한 소수 정예 직원만 남기고 회사의 전반적인 기반을 축소했죠. 중간중간 빚 독촉 전화도 받고. 회사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을 함께해준 대부분 직원을 전화로 계약 종료 통보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마케팅과 그래픽 작업, 온라인 판매 등 외주 줬던 일들을 혼자 맡아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했죠. 고객 상담 서비스도 하고 온라인 판매원도 하고"
"전화를 안 받았어도 되었을 텐데 왜 다 받았어요?"
"정말 빚 독촉 전화받는 게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그 고통이 컸어요. 근데 다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전화하는 당사자도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아무리 사업 파트너가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회사 운영 및 관리에 관여하지 않은 건 분명 제 잘못이니까요. 제가 감당해 내야 할 일은 혼자 감당해 내야죠. 어쩌면 몸으로 견뎌내야 할 당연한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채찍질 맞고 이를 악물고 더 뛰었어요. 온라인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미친 듯이 했고 1억 빚을 4개월 만에 갚아냈어요. 원상복귀해냈지만 코로나 19가 바로 터졌죠. 싱가포르 리테일이 완전히 멈춰버리고 거리에 사람이 없었어요. 샵들의 백화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고 원상 궤도에 진입을 한 다음 첫 달 적자가 나와 바로 삽들을 다 닫았습니다."
"엄청 힘들었겠어요. 근데 잘 이겨냈네요. 그 이후로는 괜찮아지지 않았나요?"
"괜찮을 틈이 없었어요. 회사가 적자 난 그달 남편이 150억 소송을 당했어요. 전에 함께 일했던 회사인데 합병이 되면서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았어요. 남편이 다른 회사와의 협엽을 하기 위해 그 회사에서 나왔는데 150억 소송이 들어왔어요. 3개 소송이었죠. 9개월간 남편 옆에서 하루에도 몇십 번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걸 봐야 했죠. 그 장단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함께하던 육아와 집안일이 온전히 제 몫이 되었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어요.
또 뭐가 있었더라? 아, 평생 갈 친구라 생각했던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소원해지더니 제 곁에서 떠나더라고요. 전화할 때마다 바쁘다고 나중에 전화하자 하더니 다시 전화가 안 오더라고요. 제가 화려할 때는 자주 만나고 통화했는데 내가 초라해지니 떠났나 하는 씁쓸한 경험이었어요.
더 있었는데. 아, 새 언니네 남자 친구가 많이 폭력적이라서 시어머님께서 근심 걱정이 심하셨어요. 또 몇 번의 사건 사고도 있었고, 딸에 대한 걱정 또 손녀에 대한 걱정이 커져서 우울증이 생기셨다는 걸 알게 됐죠. 자주자주 찾아뵙고 들여다보고 신경을 많이 써야 했어요. 조카의 상태도 걱정이 되었고.
참, 친척분들이 작고하셨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던 작은아버지가 간암으로 별세하셨고, 저를 너무나 이뻐해 주시던 큰 숙모의 알츠하이머 병세가 악화되시면서 하늘나라로 떠나셨죠. 작은 숙모 유방암 진단 소식도 며칠 전에 부모님을 통해 들었네요. 이 모든 일이 지난 9개월 동안 일어났고 잘 견뎌낸 것 같아요. 정말 죽을 것같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있지만, 너무 지쳐서 일단 멈춘 상태고요. 남편 소송 건도 무조건 빨리 끝내자는 목적으로 협상을 통해 저희 모아둔 자산을 거의 다 처리하고 정리가 되었어요.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고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었으니 다행이죠. 새언니 상황도 좋아졌어요. 진드기 같던 그 남자 친구를 집에서 내쫓아낼 수 있어서 시어머님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전부 끝날 때까지 충고, 비판, 조언, 평가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후련했다. 누군가가 나를 애써 응원하려 하지 않아서 좋았다. 남편과 가족들도 크나큰 도움이 되었지만,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말하고 났을 때 내 안에 쌓아놓은 감정의 찌꺼기가 없어진 것 같았다. 내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나와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치료 때 의사는 수면제와 우울증 제를 먹으라는 처방을 둘 다 거부했다. 잠을 줄여 일하려 했던 의도적인 시도가 분명 있었고 그로 인해 내 상태가 더 악화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항우울증제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아이가 먼저 떠오르며 걱정이 앞섰고, 사람에따라 반응이 틀리며 장기간 섭취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의사의 진단은 만성적 우울증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 따른 일시적 응급형태의 우울증이라고 봤다. 우울증의 정도가 높아 세번째에도 약물치료를 권했지만 나는 공손히 거절을 했고, 그로써 의사와의 만남은 세번째가 마지막이었다.
"그거 알아요? 줄리가 얘기한 이야기 안에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어요. 근데 딱 한 사람만 빠져있어요. 자기 자신. 줄리 딱 한 명 빠져있어요. 남들 챙기느라, 회사 챙기느라, 직원 챙기느라 한 몸 바쳐 다 견뎌냈는데 그러는 와중에 본인만 그 속에 없다는 거 알아요?"
그때 깨달았다. 괴로움을 견뎌내는 것이 꽤 익숙한 나였고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살린다고 내가 나를 죽이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어쩔수 없었으니까 이유를 대며 있는 힘껏 살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거다. 내 에너지가 모두 소진될때까지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 댓가로 나는 행복을 내주고 불행과 교환을 한 것이다. 내 인생에 나만 빠진 삶은 절대 행복할리가 없다. 나를 잃고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다. 수면제와 항우울제 없이 분명히 나를 더 빨리 찾아낼 거라는 작은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진료실을 나왔다. 나를 다시 찾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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