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이, 미련퉁이, 게으름뱅이, 투덜이, 겁쟁이 뒤로 숨지 않기
결정했다. 지나간 날과 오지 않은 날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리셋을 하고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온 힘을 내보기로 바닥을 치고 일어서보기로 했다. 내 인생이 잠시 멈춰있었지만, 이제는 비겁하게 뒤에 숨지 않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안다. 나 자신과 세상을 보는 삐딱한 시선, 만사 귀차니즘,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미련과 끝이 없는 후회, 뭐해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 허기가 진 감정, 남 탓만 하는 나쁜 생각, 사업 파트너에 대한 실망과 분노, 당장 벌어와야 할 생활비 돈 걱정. 그동안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한 나날을 보낸 나를 위로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해야겠다는 결단을 마음에 담았다. 그리곤 뒤돌아보지 않기로, 숨지 않도록 정신줄을 단단히 잡기로 했다.
지무허사 (志毋虛邪)
뜻을 바르게 세워야 하고,
뜻을 세웠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용감하게 나가야 한다.
_다산 정약용
못난이, 미련퉁이, 게으름뱅이, 투덜이, 겁쟁이 뒤로 숨지 않기 위해 한 노력 중에 가장 첫 번째로 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내가 책을 읽는 패턴은 항상 같았다. 그때그때 상황에 필요한 책들을 찾아 읽었지만, 그 이외의 책을 가까이하고 지내진 않았다. 읽는 종류의 책도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일 관련 책이었고, 사업을 시작한 후에는 비즈니스, 리더십, 직원들의 역량 강화 및 팀 연대강화, 세일즈, 자기 계발, 마케팅, 브랜딩 등 내 일에 관련된 책만 읽었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초점은 항상 일과 실력 향상, 자기관리에만 맞춰져 있었다. 이번엔 전혀 다른 분야를 읽기로 했다. 심리학, 철학, 에세이, 우울증과 관련된 뇌과학 등을 골랐다. 더 앞으로 가도록 채찍질하는 책이 아니라 나를 보듬어줄 따뜻한 말들로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감정 자양분을 응급 보충해보기로 했다.
핀란드에서는 한국 책을 구매할 수가 없었기에 전자책으로 구매를 했다. 오랜만에 한글로 된 책을 읽어서인지, 전자책이어서 그런지 정확한 알 수 없었지만, 너무 불편했다. 결국은 정말 보고 싶은 책이 있어 인터넷으로 해외배송을 했다. 문제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책은 16000원이었고 배송비만 27000원이 나왔다. 핀란드는 뭔가를 한국에 보내든 받는 저렴한 옵션이 없다. 집까지 도착하는데 2주 족히 걸렸다. 성격 급한 나로서는 속이 터져 못 할 짓이었다.
결국은 전자책으로 다시 돌아왔다. 감정이 목말랐던 나는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한국어로 적힌 전자책을 읽기로 했다. 구매해서 바로 읽을 수 있다는 점, 가만히 앉아서 혼자 할 수 있다는 점,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리면 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전자책에 적응해야 할 이유는 많았다. 물론 전자책이 안 좋은 이유는 훨씬 더 많았다. 몇십까지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에 이런 변명들을 다 눌러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책을 읽은 게 언제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한 4년 전쯤 한국에 갔을 때 선물 받은 책이 마지막인가? 그 전에는 한 6년 전쯤이었나? 맙소사! 선물 받은 책이 아니었으면 10년 만에 읽는 내 손으로 산 한국 책 읽는 거야?' 해도 해도 너무했다.
처음에는 책 한 권 끝내는데 거의 3주가 걸렸다. 작정하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디기만 했다. 전자책이 주는 불편함에 읽고 싶은 마음마저 자꾸 도망갔다. 귀차니즘 대마왕이 된 나를 어르고 달래고, 또 어떤 때는 질질 끌어다 전자책 앞에 세워놨지만 읽는 데 집중이 잘 안 되었다. 때마침 읽는 책이 번역본이었기에 서점으로 달려가 원서를 사고 싶은 마음도 컸다. 책은 넘기는 게 제맛인데 그 기쁨마저 없다. 예전 같으면 이미 진작에 그만뒀을 테지만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안에 사는 왕 투털이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정신 놓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귀차니즘 대마왕까지 이기고 나니 그 빈 자리를 포기 악마의 속삭임이 채웠다. '그만둬!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아!' 이 속삭임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버텼다.
'여태 네 선택을 믿고 했는데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잖아. 다신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훠이, 썩 꺼져 이 잡것아 !' 이 잡것과 싸움은 매일 있었다. 하루도 안 나타난 적이 없었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나를 못 믿겠다 싶어 기준을 간단하게 세웠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주에 한 권 읽던 내가, 1주일에 한 권씩 읽게 되고, 3~4일에 한 권을 읽고, 가벼운 에세이는 한두 시간 만에 읽을 수 있었다. 글을 곱씹을 여지를 주는 심리학이나 철학책 혹은 정보가 많은 뇌과학 관련 서적들은 3~4시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2020년 한 해 동안 100여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힘이 생겼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섣불리 판단하려 하지 않을 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읽는 책 한 권 한 권 소중하게 다루고 온전히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들었다. 정말 도움이 된 책들은 3독 4독을 해서 내 인생에 가져오고 싶은 내용을 정리하고 내 감정들을 적어놨다. 그리곤 그 말들을 행동에 옮겼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에서 또 다른 감동을 얻기 시작했다. 책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책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내 안에 쌓은 감정은 전부 다 내가 만들어낸 감정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혹은 어떤 사람이 어떤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극과는 별개로 나 혼자 시작한 감정들이고 반응들이었다. 내가 이 감정들을 통제해야 앞으로의 내 인생을 통제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정체성의 심리학'에서 이야기로 표현된 개인의 정체성을 심리학에서는 서사 정체성이라 부른다. 자신에게 중요한 인생 이야기들이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 즉 정체성 그 자체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내 안엔 내가 너무 많아서 당신이 쉴 곳이 없네'라는 조성모의 가시나무새 가사처럼 내 안에 복닥복닥하니 서로 싸움을 해대는 페르소나가 너무나 많다. 그 많은 페르소나에서 난 그저 나에게 딱 맞는 편안한 옷을 찾아 입듯이 내가 좋아하는 페르소나만 다시 모아보기로 했다. 내 정체성을 내가 다시 선택하고 지정하고 그 페르소나를 지켜나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못난 내 모습들도 분명 있지만, 그 모습들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다시 내렸다. 삶의 시련을 통해 사회적 지위나 직업으로 정의된 모습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진정한 목소리를 가져낼 성숙한 내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다시 재구성했다. 내 삶이 현재 진행형이고 어려운 환경과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끝 날 이야기로 이미 정했다. '어떤 도전이 실패로 끝난 것도 있지만 결국은 좋은 교훈을 뼈저리게 몸으로 배웠다'로. '결국, 큰 노력 끝에 어려움도 아픔도 잘 견뎌 내었고 그에 따른 기쁨도 있었다'라는 마무리로 내 삶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 모든 감정을 품은 여러 가지 페르소나가 전부 내 모습임을 인정한 후, 토닥토닥 다독여 주니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진정한 내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고 단단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찌질이, 걱정 대마왕, 왕 투덜이, 극귀차니즘, 겁쟁이들이 나를 멈추게 하였지만, 그 뒤로는 더는 숨어있지 않기로 하니 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성인 자아실현과 발달에 관한 탐구 프로그램을 만든 게이루스 박사는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정한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면서 그 세월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말을 했다. 진정한 내 모습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어느 순간부터 난 사회와 타협하며 나타난 찌질한 지금의 40대 모습보다 과거에 살았던 멋진 20대의 모습들이 더 사랑스럽다 여겼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다시 보니 20대의 나는 지나치게 걱정을 많이 했고,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몰랐고, 사고의 깊이가 없었다. 귀여운 젊음을 가진 그 시간보다 30대의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이겨낸 사회생활에서 받은 화려한 훈장을 갖고 이젠 웬만한 일에 걱정하지 않는 여유가 좋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찾아내는 여정 자체가 즐거운 40대의 지금이 훨씬 아름답고 깊이가 있다. 완벽한 배우자, 완벽한 부모, 완벽한 직장인, 완벽한 사업가로 완벽하게 살고자 한 내 맘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새롭게 보인다. 삶이 잠시 멈춰있다고 하더라도 내 진정한 모습이 같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말자. 다시 앞으로 데려오면 되는 것이다. 그 변화는 매일 매일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불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변화의 비밀은
한 번에
한 걸음씩이라는 것이다
_마크 트웨인 (Mark Tw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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