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드라마 그만 찍자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태도가 얼마나 부정적이고 방어적으로 바뀌어 있었는지 남편과 아이를 통해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내가 변해있음을 자각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괴로웠던 만큼 나의 불만은 공격적으로 밖으로 표출이 되었고 그 표적이 된 사람들은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남편과 아이에게 하는 모든 일에 부적절하게 불만을 표했고, 기분 나쁘게 지적을 했으며, 비비 꼬아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핀란드인인 남편은 차분하지만 나를 웃게 만드는 특유의 유머가 있어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하고 가족에게 매우 헌신적인 로맨티시스트다. 우리 둘 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데 특히 이 부분이 잘 맞아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본의 아니게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지적을 하는 피곤한 아내가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회사를 가지 않고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으니 종일 잔소리꾼이 붙어있는 격이 되었다. 참다 참던 남편은 어이없는 이유로 계속 지적을 당하자 결국은 터졌다.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전쟁을 했다. 5년 전 결혼 후 신혼 초기에 자주 권력 싸움을 했던 시기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전쟁은 일주일 가량 일어났고 시발점은 항상 나였다. 그날그날 감정의 기복에 따라 어떤 날은 남편이 못마땅한 잔소리를 쏘아대었고, 어떤 날은 게으름을 피우면서 남편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마구 시켜댔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남편에게 따뜻한 눈빛조차 한번 보내주지 않기도 했고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엔 사사건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보였고 비비 꼬는 형식으로 공중에 대고 날리는 공중 비난을 듣게 했다. 뒤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복수극을 하고 있었다.
150억 소송을 받고 난 후부터 남편은 매우 불안정했고 가정과 육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핀란드는 소송 결과가 나오자마자 승소한 사람에게 결판이 난 금액을 1달 동안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바로 소유 재산을 강제 매각당한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변호사와 매일 오가는 감정의 변화가 하루에도 몇십 번을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었다. 당시 난 최선을 다해 그의 맘이 편할 수 있도록 시시각각 남편의 감정상태에 맞춰 행동하고 말했다. 소송 건이 다 해결이 되고 나서 한참 후에 복수극 시작이 되었다. 잘 견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동안 맘에 쌓아놓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가 나를 힘들게 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내가 힘들다는 것 알리는 거였다. 내가 평소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남편은 정말 힘든 일주일을 보냈을 것이다.
아이에게도 내 불안전한 마음의 상태가 고스란히 나왔다. 세 살배기 아이가 뭐를 하려 치면 안 된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엄마가 아니라 교도관의 수준으로 아이를 내 기분에 맞춰 내 계획표대로 움직이도록 강제이행시켰다. 내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아이에게 엄한 표정을 많이 짓기 시작했고 어느 날 아이에게 빽! 소리를 쳤다. 그 날, 내 목소리 데시벨은 천장을 뚫었다.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서럽게 목놓아 우는 모습을 봤다. 아이에게 바로 '엄마가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고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려고 하는 순간 아이가 뒷걸음질했다. 그리고선 나를 피해 도망가 자기 방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계속 울었다. 그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껌딱지 같던 아이가 내게 오기를 거부할 정도로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연중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마음은 어두운 구름 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요새 내가 정말 왜 그러는지 나도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당신이 옳다.' 책을 집필하신 정혜신 작가님의 유튜브 방송을 보게 되었다. 방청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으시고 그분들의 근심, 걱정, 고민을 들어주셨다. 정혜신 작가님은 나직하면서도 작은 떨림이 섞인 목소리로 진심 어린 위로와 공감을 해주셨다. 그리고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해결을 들으면 질문을 하신 분들의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는 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방송을 본 후 작가님이 쓰신 책을 바로 전자책으로 구매해 읽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큰 위로와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내 주체하기 힘든 감정의 기복으로 연출된 나와의 일일 막장 드라마를 접을 수가 있었다.
책을 속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아픈 몸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볍게 여기지 않길 바라는 속마음, 고통을 진지하게 대해라'는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았다. '나는 진짜 나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책에서 얘기한 대로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는 문구를 보고 '나'가 흐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글들을 읽으면서도 나의 상태를 점검할 기회가 생겼다.
'우울과 무력감은 삶 그 자체일 뿐, 병이 아니다.'
'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은 날씨 같다.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화창하고 맑다가 바람이 불기도 하고 태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예고 없이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고 쓰나미가 덮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가 걸린다. 모른 체하는 데 일등이 있다면 날씨가 그렇다. 지금 날씨가 좋아도 주변의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면 내 머리 위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82페이지)’
'무력감과 우울은 지금 털썩 주저앉아 내 삶을 먹먹하게 돌아봐야 하는 때라고 알려주는 신호다. (84페이지)’
이 부분에서 내 상태에 대한 위로를 받았다.
'자기'를 드러내면, 그러니까 내 감정, 내 말, 내 생각을 드러내면 바로 싹이 잘리거나 내내 그림자 취급만 당하고 사는 삶은 배터리가 3퍼센트쯤 남은 장전 직전의 휴대전화와 비슷하다. 숨이 곧 끊어질 운명이란 점에서 그렇다. (중략) 3퍼센트 남은 에너지로 30퍼센트의 힘이 필요한 새로운 계획이나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3퍼센트를 순식간에 다 태워버리고 재가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 (89-90페이지)
부모인 내가 자식을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난 사과했어"가 아니라 엄마인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하는지 아이가 느끼고 아이 마음에 스밀 때까지 해야 진짜 사과다.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붙들고 앉아서 다시 정확하게 사과해야 한다. (271페이지)
책을 읽고 난 후, 나한테 진심 어린 위로를 해 줄 수 있었다. "많이 외로웠구나. 혼자 모든 걸 다 처리했어야 하니까 지치고 힘들었지?"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상처를 누르며 지내는 시간이 혼돈의 시간이었음을 인정했다. 애증, 분노, 자책의 감정 사이에서 나는 탈진해가고 있음을 몰랐던 거다. 답은 결국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결국은 내 마음의 실체를 보고 느끼면서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회와 짜증, 무기력, 불안, 두려움 같은 나쁜 감정을 없애고 유쾌하고 잘 웃던 나를, 긍정적이고 좌절하지 않던 그 마음을 다시 찾게 되었다. 대신 예전에는 몰랐던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듯 부정적인 감정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감정 편 가르기가 아니라 좋으면 좋은 대로 만끽하고 나쁘면 나쁜 데로 받아들이고 소화해 낼 수 있는 감정 그 자체로의 흐름을 잘 조절하면 된다는 것이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만으로 살았던 난, 그것이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항상 긍정적이니까'라는 자기 합리화와 기만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내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나와 지지고 볶고 하는 애증의 일일 드라마를 종용하기 위해 남편과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부터 했다. 진솔하게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 남편에게는 '소송건 진행하는 동안에 내가 진짜 힘들었었어. 자기가 나한테도 뾰족하게 굴고 쏘아대는 것 받아내면서 나도 버텨야 했는데 그게 상처가 되었어. 아이와 놀아주기는커녕 나랑 아이 둘 다 뒷전이었잖아. 그때는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나도 육아 가사 둘 다 돌보는데 힘들었어.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요새 자기한테 함부로 못되게 군거는 내가 비겁했어. 보복하려 의도한 건 아닌데 결국은 그렇게 되었네. 내가 받은 상처를 돌려주고 싶었나 봐. 그래야 나를 위로해준다고 생각했나 봐. 미안해. 내가 또 이상하게 굴면 바로 얘기해줘. 그만해야 한다고 그 자리에서 얘기해줘. 나도 노력할게. 사랑해.'.
아들에게도 온 체중을 실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엄마가 요새 힘들어서 루카스한테 화를 많이 냈지? 하고 싶은 것도 못하게 하고. 소리도 크게 질렀고. 정말 미안해. 루카스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엄마가 전적으로 잘못한 거야. 엄마가 요새 잠도 못 자고, 힘도 없고, 싫어지는 게 너무 많네. 엄마가 엄마한테 화가 난 거야. 루카스가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 엄마한테 화가 난걸 아무 잘못 없는 루카스한테 푼 거야. 엄마는 루카스 정말 사랑해. 엄마가 못나게 굴었는데도 엄마랑 같이 놀아줘서 고마워. 용서해줄 수 있어? 진심으로 미안해. 사과할게. 사과받아줄 수 있어?"
그렇게 나는 다시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힘들어서 무작정 누르고 사는 게 상책이라 여겼던 것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토로하는 말은 내 속마음과 같아야 하고,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들어봐야 행동과 말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참고 참다 일정 수위를 넘어설 만큼 내압이 오르면 한꺼번에 폭발하는 대참사가 난다. 이날 이후, 나와의 일일 드라마는 사랑을 더 많이 하고 전쟁을 덜 하는 로맨틱 코미디나 행복한 가족 드라마로 주제의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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