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망치지 말고, 오늘을 사세요
내 인생이 멈춰있었던 시간 9개월. 끝날 것 같지 않던 극심한 인고의 긴 터널을 지나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보니 그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 과거를 안타까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내 이성과 감정 둘 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과거에 생긴 일들에 대해 비난, 자책, 핑계, 하소연, 아쉬운 소리를 하기 바빴고, 동시에 불안전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근심, 걱정, 두려움, 무기력, 이른 포기를 자주 하고 있었다.
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그 사람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사람이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지!
전적으로 다 그 사람 잘못이야.
친구라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왜 그때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잘 했더라면 지금 상황은 더 나아졌을까?
이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을까?
이 사람은 얼마나 갈까?
지금 해봤자 너무 늦었어.
아, 하기 싫다….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난 그저 나를 방어하고 있었다고 착각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엉망이라고. 그래도 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잘 참아냈다며 자기 위로를 하고 한껏 남 탓, 상황 탓만 했다. 그래야만 내가 살 것 같았다. 한 다리는 지나간 날에 대한 미련과 후회로, 또 다른 한 다리는 머지않아 다가올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그렇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는 것이다.
_에픽테토스
양다리는 언제나 그렇듯 결과가 지저분하고 상처투성이다. 양다리에서는 이기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빠르고 현명한 선택은 과거와 미래의 양다리를 당장 그만두는 것이다.
양다리를 걸치고 살면 현재를 살지 못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닦달하고 괴롭히면서 버티게 된다. 9개월의 멈춘 인생이 내게 준 선물은 그 양다리를 그만 걸치게 하는 것이었다. 힘을 빼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을 희생하고 과거 아니면 미래를 보고 살다 보니 내게 낸 생채기만 깊어질 뿐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곤 오직 오늘만을 나를 위해 살고 싶어진 마음과 생각에 집중했다. 과거도 미래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오늘 당장은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내 몸과 마음을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해줬다. 뭘 더할까 생각하지 않고 뭘 덜 할까 생각했다.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나 자신에게 하는 채찍질을 그만뒀다.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을 그만뒀다. 앞으로 올 일에 대한 걱정도 그만뒀다. 어차피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니 흘려보냈다.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듯이 문득문득 또다시 걱정하고 채찍질을 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그냥 봐주기로 했다. '아, 내가 오늘 또 그랬구나…. 안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네….' 그렇게 나를 그 자체로 수용하고 다독여줬다. 내 모습에서 세 걸음 나와서 보니 내가 그냥 안쓰럽고, 왜 그리 힘들게 사는지 안타까웠다. 조금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못난 것 같아도 나를 받아주기로 했다. 힘을 빼고 나니 지금의 모습이 가장 찌질하다 싶어도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여유가 생겼다.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모든 사람은 완벽하게 불안하다. 완벽하게 불안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현재를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닐까?
2019년 백상예술대상에서 김혜자 대상 수상 소감으로 현장과 시청자 모두에게 감동을 줬다. 김혜자는 '눈이 부시게'에서 치매에 걸려 한지민(어린 김혜자 역)의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연기 했다.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에 나온 깊은 울림을 줬던 대사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 자세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지금 망치지 말고, 오늘을 사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읽으신 글은 <<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의 초고입니다.
완성된 글을 읽어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236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