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행복비결
'어디 사세요?'
'핀란드에 살아요.'
'휘바, 휘바'
핀란드 하면 한국에서는 휘바 휘바가 먼저 떠오르나 보다. 무민, 산타할아버지, 사우나, 자일리톨껌 같은 물건을 생각하는 것보다 'Hyvä', '좋다'라는 표현을 떠올려줘서 더 좋다. '좋다, 좋다'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느낌을 대화 문맥에 맞게 표현해주는 말이니 말이다.
핀란드에 이사 온 지 5년이 되었다. '핀란드는 어때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뽑혔던데, 진짜 행복하세요?'라고 많이 묻는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네,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 9개국에서 살 때는 안 행복했을까? 대답은 그때도 '행복했다'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느꼈던 행복과 핀란드에서 내가 지금 느끼는 행복은 매우 다르고 특별하다. 그 이유는 다른 나라에서 가졌던 경제적 여유와 명성을 다 잃었던 불행을 핀란드에 있으며 겪게 되었다. 뼈아픈 고통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좌절과 불행을 덜 느끼게 해주는 사회적인 안전망이 무엇인지 핀란드라는 나라에 살면서 경험했다. 동시에 온전히 나를 마주하는 시간과 공간을 집에서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며 배웠다.
2020년 UN 세계 행복 보고서가 발표한 '지구 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가 세계 행복도 1위에 선정되었다. 3년 연속이다. 2018년, 2019년에 이어 2020년도 역시 행복한 나라 세계 1위다. 행복 보고서는 개인이 지금 느끼는 행복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는다. 세계 각 나라 거주민들의 행복을 정량화하여 행복지수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 정부, 기업 및 시민 사회가 행복게 관한 복지를 평가 및 피드백한 것이다. 이 보고서의 진정한 의미는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 현실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데 있다. 행복 측정은 여섯 가지 요소에 따라 순위를 매겼다. 1인당 평균 소득 (GDP per capita) , 개인의 삶에 대한 선택의 자유 (Freedom to make life choice), 신뢰 - 부정부패 (Perception of corruption), 건강 수명 (Healthy life expectancy), 사회적 지원 (Social Support) , 관용 (Generosity)이 여섯 가지 요소다.
한국의 2020년 세계 행복 지수는 153개국 중 61위다. 한국인의 행복 수준이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하위 수준이다. 2019년보다 7단계 후퇴했다.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국민의 전체적인 소득 수준은 높아졌지만, 소득 격차는 벌어졌기 때문에 행복도가 더 낮아졌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보건 의료 서비스 등이 탁월해 건강이 좋아졌지만, 한국인이 체감하는 안전 수준이 다른 선진국보다 더 낮아졌고, 자살률은 더 높아졌다. 사회적으로 겪는 격차와 갈등, 성차별은 OECD 국가 31곳 조사 대상 중 꼴찌이다. 국가에 대한 불신이 심하고 개인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할 기회와 이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상당히 부족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핀란드의 탄탄한 사회 안전망과 촘촘한 지원체계, 청렴과 관용 등이 세계 행복 보고서의 1위에 오른 결과라고 말한다. 부패 없는 정부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행복 요소는 세계 행복 지수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주관적 행복은 어떨까?
핀란드 최대 일간지 <헬싱긴 사노맛 (Helsingin Sanomat)>의 문화부 기자이자 '팬츠 트렁크' 저자인 마스카 린 타넨은 그의 책에서 핀란드 사람들이 행복한 진짜 이유가 다름 아닌 '팬츠 트렁크'에 있다고 답한다. 팬츠 드렁크는 편한 옷차림으로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핀란드의 문화다. 핀란드어로는 칼사리캔니 (Kalsarikäanni)로, 속옷을 뜻하는 '칼 사리'와 취한 상태를 뜻하는 '캔니'의 합성어다. 한국의 '혼술 (혼자 마시는 술)'문화와 '소확행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과도 닮은 이 생활 방식은 핀란드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매일 밤 그들의 행복을 책임진다. 한때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이라 극찬했던 휘게 (Hygge, 덴마크어 노르웨이어로 편안하고 아늑한 상태를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와 라곰 (Lagom, 스웨덴어로 '알맞은, 적당히'라는 뜻)이 있다. 팬츠 드렁크는 휘게와 라곰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핀란드 사람들만의 '나를 만나는 시간과 공간'을 의미로 '나 다움'을 마주하는 열쇠다.
스웨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는다. 더 출세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휴일이나 명절, 야근을 하면 두 배, 세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들은 본래 자기가 일해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일부로 일을 적게 하려고 자발적으로 정규직을 포기하고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가 되는 일도 흔하다. 스웬덴과 핀란드 모두 회사에서 적게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이 되어있다. 지나치지 않은 '적당함'을 찾는다. 이것이 라곰이다. '대충'이나 '적당함' 혹은 '중간'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동양의 '중용'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말이다. 과유불급이라는 한자성어와도 비슷하다. 야심 찬 계획보다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삶의 작은 성취를 축하하며, 나를 아끼고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북유럽 국가들은 물가가 높고 날씨도 궂지만 늘 가장 살기 좋고 행복한 나라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삶의 행복의 기준을 관계, 친밀함, 편안함, 화목함, 평등함 등에서 찾기 때문이다. '휘게 라이프'라는 책을 쓴 덴마크 행복연구소의 CEO인 마이크 비킹은 휘게가 한국에서 한때 열풍의 원인에 대해 '국내총생산 (GDP)으로만 사회 수준과 삶의 질을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에 대한 불만이 역으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단기간 내에 엄청난 속도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부를 축적한 만큼 삶의 만족도가 높지는 않다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정작 필요한 것보다 남들이 얼마나 가졌는지 비교하며 불행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은 부모와 사회가 기대하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취준생은 취업 준비와 반복되는 좌절에 괴로워하고, 직장인은 업무와 자기 계발에 치열함을 강요받으며 살고 있다. 어느샌가 해야 할 일들만 빼곡하게 들어차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사랑했던 일들과 매일 멀어지고 있다. 자살률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1위인데도 항우울제 처방률은 최하위권에 속한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을 하지 못하고 나날이 그 심각성이 눈덩이처럼 불어버리게 된다.
스웨덴에 라곰이 있고, 덴마크에 휘게가 있다면 핀란드에는 팬츠 드렁크가 있다.
팬츠 드렁크는 자기답게 쉴 수 있는 완전한 휴식 방법이다.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_팬츠 트렁크 중에서
미칠 듯이 좋다는 감정을 느끼기 원한다면 팬츠 드렁크가 정답이 되어줄 수 없다. 핀란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감정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핀란드 사람들을 일컬어 외로운 늑대(Lone wolf)라는 표현을 한다. 외로움이 견디고 넘어야 할 감정이 아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감정이다. 남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감정들이 있음을 안다.
팬츠 드렁크를 한다는 것은 편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나만을 위한 휴식을 의미하며 핀란드인들이 추구하는 차분하고 고요한 삶의 방식이다. 하루 종일 멘탈과 체력이 탈탈 털린 나를 위한 완전한 휴식 시간이자, 나다움으로 돌아가는 리추얼 같은 의도적인 행동습관이다. 여기에는 자기 연민과 측은지심이 포함되기도 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자각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에 압도당하는 순간에 그저 바라보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오늘 힘들었구나, 오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나' 감정을 인지하고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 정말 수고했어. 잘했다'라고 위로를 해주는 시간이다.
팬츠 트렁크-하다 (Pantsdrunk~)
1. 어디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가장 편한 옷차림으로 혼자 술을 마시다.
2.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며 몸과 마음을 쉬게 하다.
3. 지금, 가장 트렌디한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다.
팬츠 드렁크를 하는 것은 오늘 밤부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것들로 마음이 편해지는 마법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혼자만의 약간의 평화와 고요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가 되지 않아도 되고,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잘났든 못났든 나 자신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공간에서 가장 편한 옷차림으로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면 된다. 세월이 지나도 사회적 환경이 변해도 내가 평생 함께해야 할 내 몸뚱이와 만나 몸도 마음도 쉬게 해주는 시간이다. 술 한잔 하는 것, 긴 버블 베스를 하는 것, 잔잔한 음악으로 책을 읽는 것 등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와 대면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복감을 지금 바로 느낄 수 있다.
스웨덴의 '라곰 (Lagom)', 덴마크의 '휘게 (Hygge)',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 (小確幸), 중국의 '중용 (中庸), 프랑스의 '오캄 (au calme)', 핀란드의 '칼사리캔니 (Kalsarikäanni) 혹은 팬츠 트렁크 (Pantsdrunk)는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이 아니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인 라이프스타일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타인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마음을 좀 줄이고 '나'에게 집중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늘 하루도 아주 많이 힘들었을 테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면, 오늘 저녁엔 핀란드 사람처럼 나를 위한 시간을 느긋하게 가져 보는데 어떨까?
우선 집에 들어가자마자 낮 동안 몸을 꽉 죄었던 답답한 옷과 신발, 양말을 모두 던져버리자. 자 이제, 집에서 내가 가장 편한 공간을 찾아보자. 가장 좋아하는 단짠단짠 한 과자나 즐겨 먹는 스낵을 언제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갖다 놓는다. 아직 자리에 앉기엔 너무 이르다. 제일 중요한 순서가 남았다.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내자. '치익'하는 소리와 '보글보글' 올라오는 하얀 거품을 느껴보자. 시원하게 첫 모금을 들이켜자. 입술 위에 살포시 앉은 거품은 덤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줄 잔잔한 음악을 켜보는 것도 좋겠다.
당신은 충분히 휴식을 즐길 자격이 있다. 오늘 밤, 팬츠 드렁크하며 행복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