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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킴 Mar 14. 2021

북유럽에 노키즈존 식당, 카페가 생긴다면?

한국 역 컬처쇼크 노키즈존 (No-Kids Zone)과 맘충

2018년 아이가 만 2살이 좀 안 되었을 때 나와 남편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방문하러 갔다. 내 사업 때문에 아이만 데리고 한국으로 1년에 3~4번 정도는 들어갔지만, 아이를 집에 두고 혼자 움직였던 스케줄이 많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까지 셋이 함께 완전체가 되어 한국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남편. 맛있는 것도 함께 먹으러 다니고 여기저기 여행 다닐 생각에 우리 식구는 기분이 한껏 부풀어있었다.      



 아이는 출입이 안 됩니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기 위해 한국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들에게 맛집 리스트 공수해놓았다. 한국에 도착해 여독을 풀고 그립던 가족들과 만남, 수다를 떨며 며칠 보냈다. 담백하면서도 깔끔한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손맛이 가득 담긴 엄마표 음식도 실컷 먹었다. 엄마의 수고도 덜어드리고 남편과 아이랑 서울을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맛집 탐방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세 가족은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이라 남편과 나는 후다닥 나갈 채비를 하고 나섰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들도 잘 챙겨 들고 유모차를 끌고 맛집을 찾아갔다.     


 맛집 앞에 도착해서 자리를 배정받으러 들어가려는 순간 직원이 우리를 보고 부리나케 달려온다. 그러더니 '아이는 출입이 안 됩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난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네? 아이 출입이 안 된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여긴 노키즈존입니다.'

레스토랑에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던 나는 순간 멍해졌다.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도박하거나 술을 마시는 곳도 아니고 레스토랑에 노키즈존이라는게 무슨 말인가요?‘

'네, 저희 레스토랑은 아이 출입이 안 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남편은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확인했다.

'Did she just say No kids zone? or Have I heard it wrong? 방금 노키즈존이라고 한 거야? 내가 잘 못 들은 거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이미 많은 나라를 여행 다녔지만, 레스토랑에서 아이를 못 들어오게 막는 노키즈존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받는 역 컬처쇼크였다. 난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No kids zone? You gotta be kidding me. 노키즈존 ? 장난인 거지?' 남편도 그 상황을 이해 못 하긴 마찬가지다. 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응, 아이들은 못 들어간다네. 다른 곳을 가야 할 것 같네.'라고 얘기하며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남편은 입술이 꽉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매우 언짢을 때 하는 행동이다.     


 우린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레스토랑을 갔고 문전박대를 또 당했다. 유모차를 끌고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입장 거부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세 번째를 겪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화까지 났다. 동시에 남편에게 부끄러웠다. 한국이 언제 이렇게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런 현상들에 대해 사람들은, 사회는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 역 컬처쇼크 노키즈존 (No-Kids Zone)과 맘충     


세 번째 레스토랑의 입장 거부를 받고선 핸드폰으로 급하게 검색했다.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아봤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곳으로 서둘러 갔다. 아이도 남편도 나도 허기가 져서 뭐라도 먹어야 했다. 식사시간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노키즈존의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얼떨떨하기고 기가 막혔다.      


 침묵하고 있는 남편에게 살포시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에 핀란드에서 누군가가 노키즈존 레스토랑을 연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남편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런 아이디어를 낼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만약에 어떤 "용감한" 사람이 노키즈존 레스토랑을 열었다고 한다면 시민 단체뿐만이 아니라 국가에서 법적인 제재가 들어가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음식을 먹는 레스토랑이잖아. 아이들이 못 들어갈 곳이 아니지. 이건 극명한 아이 차별이고, 아동 인권 침해지'. 그렇다. 장애인의 휠체어가 식당 운영에 불편하다고 '장애인 출입금지'라고 써 놓아서는 안 되듯, 노키즈존은 아이들에 대한 엄연한 아동 인권 침해로 보였다.     


 한국에서 'No-Kids Zone'은 구체적인 행위나 대상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라는 특정 집단 전체를 차단하는 행위이다. 출입금지 대상은 유모차, 5세 미만, 7세 미만, 미취학 아동,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매우 다양하다. 노키즈존을 선언하는 업소들의 고충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어느 손님이 아기의 변이 묻은 기저귀를 커피전문점 테이블 위에 두고 간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몰상식한 부모가 존재하며, 적절한 통제를 받지 않는 아이들의 소란으로 사고 위험이 커지고 있는 부분도 있고 업주가 감수해야 할 손해배상에 대한 문제도 크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의 화살이 왜 아이에게 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문제는 '노키즈존'은 아이라는 집단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해로운 사물이나 동물과 같은 피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아이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차별과 혐오의 정서를 증폭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죄가 없다. 제대로 교육을 하지 못한 부모의 잘못일 수는 있다.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아이들이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건강하고 밝은 아이로 자랄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아이가 느껴야 했던 '부당한 거부'를 생각해 본 걸까? 자신 때문에 어디를 같이 못 들어가고 존재 자체를 거부받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긴 한 걸까?      


 노키즈존 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은 말이 있었다. 차마 핀란드 남편에게 말할 자신이 없어 말해주지 못했다. 바로 '맘충'이라는 말. 엄마를 뜻하는 '맘(mom)'의 뒤에 경멸과 혐오의 의미로 '벌레충(蟲)'을 합친 '맘충'. 노키즈존에 이어 맘충을 설명하려니 한국인으로서 내가 창피해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맘충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서 난 가슴이 너무 아파 울컥 눈물이 날뻔했다. 도대체, 어떻게, 무엇 때문에 한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벌레라는 말을 붙여 쓸 수가 있단 말인가? 한국이라는 사회가 처음으로 무서워졌다. 아무리 카페나 음식점 등 공공장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특정 젊은 엄마들의 행동이 문제가 된다고 해도 모든 엄마가 그러지 않는다. 소수의 문제점을 전체인 것처럼 확대해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일상화될 수 있다는 것에 한국 사회가 무섭고 두려웠다. 또 한편으론 혼란스러웠다. 맘충이 있으면 대디충도 있어야 공평할 텐데 그럼 대디충은 왜 없을까?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짙으니 대디충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말일까? 부모충도 아니고 왜 맘충이냐 말이다.     





노 배드 페런츠 존 No bad parents zone


 아동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보다는 나은 말이 생겨나서 천만다행이다. '노 배드 페런츠 존', 매장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나쁜 부모 출입제한'이라는 뜻이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은 책임을 어린이에게 전가하고 있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아예 원천적으로 입장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노 배드 페런츠 존'이 훨씬 낫다.


 다른 대안으로 '부모님 주의 존'같이 큰 동영상 소리, 장난, 뛰기, 유모차로 매장 내 배회 등 행위 시 직원이 제지하거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고 경고를 하기도 한다. '다른 고객에게 피해 안 끼칠 자신 없는 어린이는 출입을 삼가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도 있다.


이런 현상은 적어도 공공장소에서 어린이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도 그것은 아이 스스로의 문제라기보다 보호자 혹은 부모의 책임이 크다는 바를 시사한다.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연습시키고 스스로 만들어 주는 것은 보호자에게 묻겠다는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것이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키즈시즘 (Kids-cism) 같은 어린이 혐오 풍조가 조성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가 아이로 자랄 수 있는 행복한 나라     


 한국에서는 아이에 대한 전제가 '조용하고 예의바름'에 바탕을 두는 성향이 큰 것 같다. 우리 중 어렸을 때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네, 부모님 말씀하시는 대로 할게요'라고 말하며 자란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고, 시끄럽고,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또 그런 모습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증거 아닐까? 물론 성격에 차이는 있다. 소란스러운 아이도 얌전한 아이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에 대한 기대와 전제를 잘못 지정하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린 무늬가 어른인 아이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핀란드에서는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경우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식당이나 커피숍에는 아주 소규모가 아닌 이상은 어디에서나 아이들이 노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있기 때문이다. 복도 한 중앙을 가로지르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아이가 앉아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림 그릴 도구가 항상 마련되어있다. 장난감도 구비되어있고, 규모가 좀 더 크다면 에너지를 발산할 타고 놀만 한 장치를 한 아이들만을 위해 장소가 있다. 하지 말라고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소란을 피우지 않아도 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업소에서는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아기 의자를 갖추지 않은 식당이나 카페가 없다. 이유식을 기꺼이 데워주고, 아이와 부모를 보며 웃음을 지어준다. 아이와 사투를 벌이면서까지 나간 외출은 부모에게도 역시 힐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집과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사회성과 인성교육,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교육하는   노력을 들인다. 공공장소에서의 옳고 그른 행동을 꾸준히 교육한다. 부모와 함께 식당이나 카페에 자주 많이 가서 실패하고 실수하는 기회를 끊임없이 만들어 주며 연습을 시킨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있을 때는 부모가 사과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자발적으로 떠난다. 아이는 그런 부모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배운다. 다른 사람과의 불찰이 있을  부모가 어떻게 해결 는가를 보고 사회생활의 일부분을 배운다. 공공장소도 아이들의 배움의 터전이다. 사회성을 배울 기회를 아이에게서 뺏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울 때 남에게 극심한 피해가 되는데도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타인과 더불어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 같은 인격과 인성은 아이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식만 소중하다는 잘못된 인식이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신감 있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만 아는 아이'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부모 자신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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