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나는 1969년에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생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1996년 10월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큰아이는 지금 미국에서 약학박사 과정의 마지막 1년을 보내고 있고, 두 살 터울 둘째는 코로나 사태로 한국으로 들어와서 서울대학교 수학과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고, 미국 보스턴 대학 수학과 3학년이다.
내 나이 또래 부부모임을 나가면 대부분 자식 얘기로 꽃을 피운다.
누구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니로 시작해서 부럽다로 보통 끝이 난다.
나 역시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첫째는 중학교 2학년 말에 월반을 해서 명문 국제고에 입학했다. 한화 그룹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였고, 전국에서 20명만 선발해 전 과정을 미국 고교 커리큘럼으로 외국인 교사가 직접 가르치는 고등학교였다.
그러다 고3 때 미국의 6개밖에 없는 영재과학고에 합격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미국 동부 약대 PharmD 5학년이다.
내년에 졸업하면 미국 약사가 된다.
둘째는 만능 스포츠 맨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거의 대부분 학교 체육에서 MVP를 받았다. 수학에 재능이 있었고, 고교 졸업 후 미국 피츠버그 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이름 있는 다른 좋은 대학에 합격장을 받아놓고도 오로지 축구가 하고 싶어서 피츠버그를 선택했다. 1년만 도전해보고 안되면 다른 길을 찾겠다고 다짐하고서는 결국 1년 후 보스턴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아들은 스스로 축구선수로서는 경쟁력이 없다 판단했다고 했다.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인해 3월 14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항공사에 연락이 되지 않아, 공항으로 무조건 짐 싸들고 가서 귀국행 티켓을 변경하라고 했고 다행히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첫째는 다시 5월에 미국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약사가 되기 위한 현장 실습 필수 코스를 무조건 이수했어야 했다. KF94 마스크를 참 많이 보냈던 기억이 살아있다.
둘째는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학업을 이어가기로 했고, 서울대 수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부부 모임이나 사회에서 만난 또래의 사람들이 대부분 하는 질문이다.
자식 농사 잘 짓는 법에는 정도가 없다.
나는 자식들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들과는 스포츠로 대화를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발전시키며 끊임없이 지속했다.
큰 아이와는 음악으로 소통했다.
감성을 가르치는 것은 음악이 최고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큰애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어서 한때 전공도 고려했었지만, 결국 취미생활로 선택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엄마에게 음악적 감성을 키울 수 있도록 해 준 것에 정말 감사한다.
지금도 가끔 아이들과 주말에 바이올린, 기타, 건반으로 가족 합주를 한다,
성당을 다니면서 매년 2~3회씩 수녀원에 가서 봉사 활동으로 가족 미사 연주를 도맡아 해오고 있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은 커피와 음악으로 대화하고 또 주말의 여유를 즐긴다.
아들은 베토벤 월광 소나타를 가장 사랑한다.
아침에 눈떠서 제일 먼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동화책을 읽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했고, 잠들기 전에도 책을 놓지 않게 했다.
매달 일정 금액을 책값으로 책정하고, 그렇게 실천했다.
거실에는 TV 대신 책장과 오디오가 자리를 대신했다.
이사를 가기 전에는 책을 정리하고 나누어 주는 것도 일이었다.
"공부해라"라는 단어는 내가 거의 쓰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건강한 스포츠 정신으로 즐기면서 살아가기를 바랐고, 딸에게는 감성 소녀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얼마전 읽기 시작한 김형석 교수님의 책을 인용하면,
"나는 지금도 성공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유명해지기 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이 더 귀하다고 믿는다. - 김형석 백년을 살다보니 중"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에서는 절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구성원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공한 자식을 만드는 것 보다는 행복한 자식을 만드는 일이 값진 일이 아닐까 한다.
이제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연재로 기록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