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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샘 Dec 10. 2018

[명화와 역사] 10, 아편전쟁과 홍차 (1840)

- 로버트 웨스트, 〈차 마시는 토마스 스미스 씨와 그의 가족〉

[명화로 보는 19세기 역사이야기] 10, 아편전쟁과 홍차 (1840)

- 로버트 웨스트, 〈차 마시는 토마스 스미스 씨와 그의 가족〉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전쟁. 마약을 팔아먹기 위해 이를 수입금지한 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킨 대영제국의 민낯을 보여준 말도 안되는 전쟁이다. 18세기 세계 최고의 국부를 가진 나라 청나라. 당시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이른바 뛰어난 세명의 황제들에 의한 3대 황금기 동안에 태평성대를 누렸고 세계 최고의 부를 누렸다. 특히 청나라의 비단, 도자기, 차는 유럽에서 매우 인기가 많아서 영국은 이 물품들을 집중적으로 구매하다 보니 영국에서 청나라로 막대한 양의 은이 들어갔다. 그러나 청나라는 광저우 한곳만을 개방하여 무역했고, 영국 상인들의 행동을 제한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17세기부터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차가 ‘중국의 신비한 음료’로 알려져 만병통치약이자 보약으로 알려져서 상당히 고가였음에도 국민음료가 되어 있었다. 반면에 영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모직물은 청나라에서 관심이 없었다 보니 딱히 수출할 물건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무역 역조를 반전시키기 위하여 영국은 18세기말부터 청나라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일반 농민에서부터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아편은 청나리 전체를 좀먹는 사회문제로 변해버렸다. 19세기에 이르러 청나라 관료들은 부패했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반면, 이를 부양할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은 따라오질 못했다. 그러자 중국 국민들은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아편에 더욱 탐닉했던 것이다. 또한 영국으로부터 유입된 은이 다시 아편값으로 다시 유출되면서 청나라는 경제위기까지 겹치게 되었다. 

드디어 아편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청나라 조정에서는 아편금지령을 내렸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러자 1839년 청나라의 도광제는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칙서에게 흠차대신 전권을 주고 아편단속을 하여, 아편 밀수업자들은 처형하고 외국 상인들의 아편은 강제로 빼앗아서 폐기하고 그 보상은 차로 대신해주었다. 그러나 영국상인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7월에는 홍콩에서 술 취한 영국 수병이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는데 영국은 치외법권을 주장하며 그 수병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이때 출동한 청나라의 29척의 함선들은 단 두척의 영국 군함에 대패하여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영국의회에서는 표결 결과 찬성 271, 반대 262표로 청나라와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 6월 수십척의 영국 함대가 광저우에 도착하여 1차 아편전쟁이 시작된다. 이미 광저우에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을 본 영국군은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 바로 옆 항구도시인 텐진에 도착하게 된다. 이에 놀란 청나라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하고 기선을 협상대표로 보냈지만, 기선이 배상금 600만냥과 홍콩 할양의 의 조건을 수용하자 분노하여 다시 기선을 파면하고 다시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패배하여 1842년 6월에 난징조약을 맺고 2천만불의 배상금과 홍콩할양 그리고 5개항구의 개항 등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의 무역적자는 줄어들지 않던 중, 1856년 애로우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영국은 이번에는 크림전쟁에서 같은 편이 됐던 프랑스와 연합하여 다시 광저우를 점령한다. 그리고 북상한 영불연합군이 텐진을 위협하자 다시 텐진조약을 맺으며 굴복하게 된다. 하지만 청나라 정부가 무효를 선언하자 영불연합군은 베이징까지 진격하여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러시아에게 연해주까지 빼앗겨버리고 만다. 이로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감이 두려워하던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임이 드러나게 되었고, 수천년간의 중화사상이 무너진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국가들도 큰 충격을 받게 되면서 근대시대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한편 영국의 국민음료가 된 홍차는 물론이고 홍차를 마시기 위한 고가의 도자기를 확보하고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벌인 아편전쟁으로 영국은 보다 안정적으로 중국산 차와 도자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733년 제작된 웨스트의 <차 마시는 토마스 스미스씨와 그의 가족>을 보면, 어린아이부터 노모에 이르기까지 전세대가 등장하는 가족테이블에서 차가 이미 사회적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용도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영국에서 차는 가정의 행복과 번영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영국의 홍차는 또 다른 형태의 아편이 되었다..

● 1997년 중국 영화 ‘아편전쟁’
https://www.youtube.com/watch?v=YWzeZ5sNxmk

 ++ 로버트 웨스트(Robert West), 〈차 마시는 토마스 스미스 씨와 그의 가족(Thomas Smith and His Family at Tea)〉, (1733년), 캔버스에 유채, 59.5×89 cm, 영국 업튼하우스(Upton House)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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