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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샘 Jun 03. 2020

꽃그림 명화 13, 르느와르

- 꽃과 여인의 향기

꽃그림 명화 13, 르느와르, 꽃과 여인의 향기 

가난한 양복점의 일곱명의 아들 중 하나로 태어난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 184`~1919)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가난해서 미술교육을 시켜 줄 수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13세의 그를 도자기 공장에 보내 그림을 그려 돈을 벌어 오도록 했고, 르느와르는 여기서 꽃무늬를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린 르느와르는 도기 접시에 꽃무늬나 꽃다발을 그리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눈만 뜨면 도자기에 그리던 꽃무늬, 이 때 터득하게 된 꽃그림들이 그의 평생의 색채 효과를 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그는 어느새 꽃의 화가가 되었다.

르느와르는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초기 시절, 글레르의 화실에서 모네, 시슬레, 바지유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또 다른 거목 모네와는 평생의 예술을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모네가 빛의 위대함과 눈부심의 효과를 그린 화가라면, 르노와르는 봄 햇살 같은 따스함을 캔버스에 담아낸 화가였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작품 속에 보다 많은 밝음과 기쁨을 표현해 내었다.

1879년부터 살롱전에 매진하면서 다소 인상파와 거리를 두면서, 르느와르는 부드러운 곡선미의 여인의 피부위에서 뽀얗게 피어나는 햇살의 반사광을 주로 그렸다. 야외 광선아래 변화하는 풍경을 그리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다르게 르느와르는 예외적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던 것이다. 

살롱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 세속적인 명성과 부를 조금씩 축적해 나가던 르느와르는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모델 중에는 당시 만인의 연인이자 나중에 화가가 되는 쉬잔 발라동도 있었다. 

잘 나가던 르느와르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열아홉 살의 연하의 여인, 20세의 알린을 만나 사랑을 키우게 된다. 알린은 르느와르를 알게 되자 그동안 호구지책이던 바느질 일을 그만두고 르누와르의 전속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르느와르는 그녀와의 사랑은 별개로 결혼은 안하고 있다가, 10년뒤에 결혼식을 올렸고 이들은 세 아들을 낳았다.

1890년대부터 르느와르는 꽃과 여인들 특히 누드화를 주로 그렸는데 전체적으로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후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누드화를 그렸다. 젊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자연과도 같은 그 아름다움에 동화되어가는 기쁨을 놓치기 싫었던 듯하다. 

르느와르의 누드 모델은 아내 알린의 사촌 가브리엘과 젊은 모델 데데가 주로 하였다. 가브리엘은 20년간 르느와르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주된 모델이었지만, 알린과의 불화로 가브리엘은 미국으로 떠난다. 데데는 르느와르의 마지막 누드 모델이었는데, 훗날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는 르느와르의 둘째아들 장과 결혼을 하여 르느와르의 며느리가 되었다. 

말년에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손가락에 붓을 묶어놓고 그림을 그렸다. 르느와르의 아내는 1915년에 아들 장을 만나러 갔다가 세상을 떠났고 르느와르는 아내보다 4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 인상주의 기법으로 계승한 뛰어나 색채화가 르느와르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 뢰지옹 도네르 훈장을 받았고 그의 빛나는 작품들은 우리에게 아직도 많은 위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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