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와 반다이크의 삼중초상화

by 봉샘

찰스 1세와 반다이크의 삼중초상화


어제 윤석열 내란재판에서 지귀연 판사가 사례로 인용했던 찰스 1세의 내란죄 처벌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찰스 1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강한 존재였을까요? 영국 찰스 1세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통치는 오히려 어린 시절의 결핍과 상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약한 왕자 찰스 1세는 1600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임스 1세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있다가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면서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서열 1위였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습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첫 잉글랜드 국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찰스는 처음부터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형 헨리 프레더릭이 왕세자였습니다. 찰스는 병약했고, 말더듬이였으며, 또래보다 체구도 작았습니다. 걷는 것조차 늦어 두 다리에 교정기를 차야 했습니다. 강인한 전사형 왕자를 기대하던 궁정 분위기 속에서, 그는 늘 비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1612년 요절하면서 비로소 왕세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은 승리가 아니라 공백 위에 놓인 운명이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학문을 사랑한 군주였고, 동시에 왕권신수설의 이론가였습니다. 그는 『자유 군주제의 진정한 법』에서 왕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직접 부여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찰스는 이 사상을 거의 종교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왕은 법 위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찰스는 아버지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제임스는 타협과 언변에 능했고, 의회와 갈등하면서도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찰스는 내성적이었고, 침묵 속에서 고집을 굳혔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왕권의 신념이었지만,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은 정치적 유연성이었습니다.


찰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잉글랜드 왕으로 통치했습니다. 이중적 정체성은 그의 운명을 규정합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전통이 강했습니다. 교회의 자율성과 엄격한 개혁 신학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찰스는 헨리 8세가 앤 뷸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면서 만든 잉글랜드 성공회의 전례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1637년, 그는 새로운 기도서를 도입합니다. 그 순간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성당에서 한 여인이 의자를 던지는 항의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도서 폭동”입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귀족과 서민들은 국민서약(National Covenant)을 체결하고 왕권에 저항합니다. 그들은 왕의 종교 개입을 거부하고, 장로교 신앙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갈등은 주교 전쟁(Bishops’ Wars)으로 번졌지만 두 번의 전쟁에서 잉글랜드 군대는 경험많은 스코틀랜드 군대에 패하고 오히려 잉글랜드 영토를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결국 찰스는 더 이상 혼자 버틸 수 없었고 고향인 스코틀랜드와의 전비 마련을 위해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해야 했습니다. 그는 1629년부터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했었습니다. 이른바 ‘개인 통치기’입니다. 결국 11년 만에 소집된 의회가 이른바 ‘단기 의회’(Short Parliament)입니다. 그러나 의회는 전비보다 왕권 남용 문제를 먼저 논의하려 했습니다. 찰스는 분노했고, 곧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전황은 더욱 악화되자 결국 다시 의회를 소집하는데 이것이 ‘장기 의회’(Long Parliament)입니다. 이 의회가 훗날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결국 그를 재판에 세우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잉글랜드 의회를 다시 불러냈고, 그 의회가 결국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주체가 됩니다.


찰스는 의회를 신뢰하지 않았고, 의회는 왕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혼자서 운영되지 않습니다. 전쟁, 세금, 종교, 군대—이 모든 것은 의회와의 협의를 필요로 합니다. 스코틀랜드와의 충돌은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어디까지 국가를 자신의 의지로 재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1641년, 의회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3년마다 의회 소집 의무화(Triennial Act), 왕이 임의로 의회를 해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 특별 재판소(성상재판소 등) 폐지 등을 의결했습니다. 의회는 명확히 말한 것입니다. “왕은 통치하되, 독단적으로는 통치할 수 없다고.”


여기에 더해 1641년 11월, 의회는 대항권 요구서(Grand Remonstrance)를 통과시킵니다. 왕의 지난 정책과 종교 개입을 비판하며, 군 통수권과 각료 임명권까지 의회의 동의를 요구했습니다. 표결은 간신히 통과되었습니다. 하지만 의회 내부에서도 이미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의회는 둘로 갈라집니다. 왕권을 존중하며 제한적 개혁을 원하는 온건파와 왕권을 강하게 제약해야 한다는 급진파로 갈라지고, 균열은 곧 진영이 됩니다.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Royalists)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Parliamentarians)로 갈라지게 된 것이지요. 1642년 1월, 찰스는 무장 병력을 이끌고 하원에 직접 처들어갑니다. 그는 의회를 선동했다고 여긴 다섯 명의 의원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피신한 뒤였습니다. 왕이 의회에 군대를 동원해 진입한 사건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왕은 협상의 상대가 아니라, 무력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런던 시민은 의회를 지지했습니다. 수세에 몰린 왕은 수도를 떠나야 했습니다. 결국 정치적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면서 영국 내전(Civil War)이 발발하게 됩니다.


1645년, 네이스비 전투(Battle of Naseby)에서 왕당파는 결정적 패배를 당합니다. 의회군의 신형 군대(New Model Army)는 조직과 사기, 지휘에서 우위를 보였습니다. 왕의 근위대와 기병은 용맹했으나, 전쟁의 추는 이미 넘어가 있었습니다. 1646년 봄, 옥스퍼드가 포위되자 찰스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왕복과 호위병을 버리고 변장을 합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군대에 몸을 의탁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합니다. 5월 5일, 그는 사우스웰(Southwell)에서 스코틀랜드군에 투항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사실상 왕이 아닌 ‘협상 카드’가 됩니다. 스코틀랜드는 그에게 종교적 양보를 요구했습니다. 장로교 체제의 확립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찰스는 끝까지 전면적 양보를 거부합니다. 왕권과 주교제에 대한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1647년 1월, 스코틀랜드는 재정 보상과 정치적 합의 속에 찰스를 잉글랜드 의회에 인도합니다. 그런데 그는 의회가 아닌 신형군(New Model Army)의 보호 아래 놓입니다.

그러다 1647년 11월, 찰스는 와이트 섬으로 탈출합니다. 카리스브룩 성에서 새로운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정치적 균형을 흔들려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비밀리에 접촉해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는 대신, 종교적 양보를 암시합니다. 이 움직임은 1648년의 제2차 내전을 촉발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왕의 이중적 협상은 군대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합니다. 찰스는 카리스브룩 성에 엄중히 구금됩니다. 이번에는 더 이상 ‘협상 대상’이 아니라,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로 간주됩니다. 1648년 12월, 크롬웰이 이끄는 군대는 의회를 정리합니다. 이른바 프라이드의 숙청(Pride’s Purge)이라는 사건입니다. 왕과 타협하려는 의원들이 배제되고, 급진적 공화주의 성향의 ‘럼프 의회’가 남습니다. 이후 찰스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세인트 제임스 궁과 이후 화이트홀에 구금되며, 왕이던 이는 이제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가 되었습니다.


찰스 1세의 재판은 단순한 패자의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병약했던 소년, 아버지의 신념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 왕자, 자신의 신앙과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던 군주. 그는 끝까지 말했습니다.

“나는 왕이다. 왕은 지상에서 그보다 상위의 재판권에 의해 심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답했습니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법 위에 설 수는 없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1649년 1월 30일 런던 화이트홀 궁전 연회장 앞에서 공개적으로 단두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고 전해집니다.


초상화 앞에서 반 다이크는 그를 우아하고 위엄 있게 남겼습니다. 특히 <찰스 1세의 삼중 초상화 (Charles I in Three Positions)>는 한 사람을 세 번 그린 초상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왕의 얼굴을 정면, 좌측, 우측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이 작품은 권력의 전면과 이면, 그리고 운명을 향한 고독까지 담아냅니다. 권위와 고독, 확신과 섬세함이 교차하는 왕의 심리의 다중성을 나타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 속에서 다른 것도 봅니다. 어린 시절의 위축, 아버지의 그림자, 스코틀랜드와의 균열, 그리고 타협하지 못한 신념. 통치자의 비극은 종종 오만이 아니라 확증편향적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찰스 1세는 악인이기보다, 시대를 읽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왕이 스스로 국가와 싸우는 순간, 그는 왕이 아니라 정치 행위자가 됩니다. 그리고 정치 행위자는, 결국 역사 앞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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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van Dyck (1599-1641), <찰스 1세의 삼중 초상화 (Charles I in Three Positions)>,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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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van Dyck (1599-1641), <찰스 1세와 생 앙투안 (Charles I with M. de St Antoine)>,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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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van Dyck (1599-1641), <찰스 1세 (Charles I)>, Government Art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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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van Dyck (1599-1641), <찰스 1세와 헨리에타 왕비 (Charles I of England and Henrietta of France)

The attempted arrest of the Five members by Charles I in 1642, painting in the Lord's Corridor, Houses of Parliament, by Charles West Cope.jpg

Charles West Cope, <다섯명의 의원을 체포하려는 찰스 1세 (The attempted arrest of the Five members by Charles I)> 1642, painting in the Lord's Corridor, Houses of Parli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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