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의 디자이너가 하는 일
제가 아는 한, 네 글자로 불리는 가장 멋진 직업 중 하나는 디자이너입니다. 처음 용돈과 알바비를 모아서 21인치 아이맥을 샀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조심스럽게 박스를 헤치고 좁디좁은 기숙사 책상에 못생긴 것들을 다 치우고 수업에서 디자인했던 라디오를 마치 대단한 작품인 것처럼 올려두었습니다. 그리곤 매직 마우스, 키보드를 얌전히 책상에 앉혀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맥을 부팅했습니다. 그리곤 크롬 확장 애플리케이션 Momentum에서 제공하는 깔끔한 배경화면을 깔아 두고 이리저리 돌아가며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날, 감자튀김에 맥주를 연상하게 하는 <감맥>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아이맥에 붙이며 '나도 멋진 디자이너라는 것이 되겠다'라고 했던 다짐은 오늘까지도 이어오고 있습니다. 새로 산 맥북과 하얀 벽에 붙은 포스트잇 몇 개, 요즘 유행하는 생산성 툴에 적힌 할 일과 미팅 리스트를 적는 것만으로도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두근거림이 찾아옵니다.
디자이너가 된다는 일은 그만큼 멋진 일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진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멋있는 디자이너를 꿈꾸는 디자인 학부생과 예비 디자이너들은 수년간 강훈련을 거치며 강해집니다. 밤새 동그라미와 그리고 선을 그어가며 수십, 수백 자루의 연필을 몽땅 내버리고, 아기 피부 같은 마감을 위해 사포질을 해대면서 정작 우리의 피부는 사포처럼 까칠해져 버립니다. 디지털 작업은 자리에 앉아서도 근사한 겨울왕국의 궁전도 렌더링 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고작 올라프의 동그랗고 하얀 몸통에 나뭇가지 몇 개 달았을 뿐인데 컴퓨터는 듀 전날이면 비명을 지르며 산화합니다. 바야흐로 협업이 필수인 시대에 조모임을 하러 왔을 뿐인데 회의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갑자기 고산증이 찾아왔는지 숨이 턱턱 막힙니다. 할 일이 너무 많고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어서 고난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요즘 디자이너가 겪고 있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구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하는 일이 뭐야? 그림 잘 그려? 아니라고? 그러면 뭐 핸드폰 앱 만드는 그런 거니? 뭐 그건 또 아니라고? 원래 디자인이 그렇게 복잡한 거니?"
디자인은 특정 직업군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 하나입니다. (Design Expertise, 2013, Brtan Lawson).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지구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디자인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살아왔습니다. 아주 오래전, 우리의 대선배님들은 토기에 빗살무늬를 그려 넣으면서 미적 감각을 뽐내시기도 하셨죠. 멀지 않은 과거까지만 해도 디자인의 역할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제품을 효율적이고 미적으로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요즘 디자인이 다루는 범위는 너무나 넓습니다. 어쩌면 인구보다 더 많은 사용자가 존재합니다. 어떤 한 개인은 20대 여성이면서, 스트릿 쇼핑몰, 운전면허학원, 야식 배달 앱,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의 예비 고객입니다. 디자이너는 사용자의 라이프 패턴을 이해하고, 니즈를 찾아내고, 그들의 문제를 정의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결합니다. 더군다나 그 수단이라는 것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가깝게는 가전 기구나 청소 도구부터 시작해서 전자제품, 눈에 보이지 않는 애플리케이션 화면과 같은 디지털 프로덕트, 그리고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플랫폼이나 서비스마저 디자인의 대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디자인은 한 마디로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결국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이 말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 제품의 외형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서비스 형태와 사용자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죠.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전문가'가 되려는 여러분을 오히려 머리 아프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디자인을 여러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디자인을 바라보는 통합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요즘 디자이너가 하는 주요 업무이자 가장 중요한 일은 "정하기"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주제도 있고, 적당한 사용자층과 대략적인 결과물의 형태도 정해져 있지만, 팀원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할지 정해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뚜렷하게 정해진 것이라고는 각박한 예산과 숨을 조여 오는 듀뿐이죠. 2016년에, 마지막 학부생 시절에 가전제품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했었습니다. 결과물까지는 4개월의 시간이 있었고, IoT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과 가정환경에 필요한 시스템을 제안해야 했습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 없었죠. 정확한 사용자의 특성, 우리가 만들 제품의 이미지, 아이디어, 누구를 경쟁사로 정할지, 디자인 목표를 어떻게 구체화할지 모두 정해야 했습니다. 단지 몇 분짜리 시나리오 동영상과 콘셉트 스케치를 결과물로 내놓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셀 수도 없는 회의와 포스트잇, 바탕 화면에 넘쳐나는 더미 파일과 함께한 수많은 과정이 뒤따랐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Secondary Research(Trend) : 프로젝트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트렌드와 경쟁사, 밀접한 시장 동향을 파악하기
Secondary Research(User) : 타깃 유저의 특성, 생활 습관, 사회적 위치를 정하기
Design Brief :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타깃 유저가 필요로 하는 가치, 해결책을 내놓을 방향을 정의하기
Primary Research : 정한 디자인 골을 바탕으로 타깃 유저에 대한 관찰 방법 고안 및 실제 관찰 데이터 축적
Meta Insights : 조사한 내용, 관찰한 사용자 데이터를 모두 포함하여 프로젝트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발견점 정하기
Idea Workshop & Development : 메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아이디에이션과 피드백을 반복하여 하나의 큰 콘셉트로 발전시키기
Final Delivery : 전체 콘셉트에 대한 서비스 내 사용자와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콘셉트를 설명할 수 있는 프로토 타입과 시나리오 비디오 제시하기
이용자가 2억이 넘는 넷플릭스 같은 거대한 화면 조차 눈에 보이는 화면을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봅시다. 이렇게 할 일들을 늘어놓고 나면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은 전체에 비하면 아주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서비스나 플랫폼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오히려 사용자에게 더욱 뚜렷하게 와 닿습니다. 우리가 넷플릭스와 배달의 민족에 열광하는 것은 아름다운 재생과 주문 버튼 때문이 아닙니다. 퇴근 후에 이불을 덮고 은은한 조명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싶은 욕망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꼬질꼬질한 옷차림으로 밥 시켜 먹고 싶은 우리 마음을 제대로 정찰당했기 때문이죠. 성공한 서비스의 디자이너들은 사용자 니즈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습관, 행동까지 파고들어 콘텐츠나 제품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만나게 해 줍니다. 깔끔한 화면의 트랜지션과 UI 컴포넌트의 배치는 수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요소와 씨름하며 적절한 수단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시스템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디자인이란 항상 다각적인 면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한 줄에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가 이해한 대로 가볍게 줄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스템 디자인 : 디자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올바른 왜>를 통해 이루기 위한 노력
여기서 디자인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디자인 대상을 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구청의 정책 담당자가 인접한 대학가의 청년들을 위한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고 당신은 담당 디자이너로 고용되었다고 해봅시다. 담당자는 공공데이터를 통해 이 근방에는 20대 대학생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한 이벤트성 막걸리 축제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당신은 우선 디자인 대상인 청년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아야겠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꼼꼼히 설계된 인터뷰와 설문, 워크숍을 통해 알고 보니 이 거리엔 외국인 유학생 비중이 컸고 가난한 청년 사업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활용한 설문 기법, 워크숍, 인터뷰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보여주진 않지만, 디자인 대상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전에 잘 모르던 것, 혹은 일종의 오해가 있던 대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담당자에게 기존의 기획을 바꾸고 외국인 청년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목표를 새롭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왜?'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디자인 과정과 결과물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학생들은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방법을 '논리적'인 해결 방법과 착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저희는 경제적 어려움을 가진 꿈 많은 20대를 위해서 청년 1인 식당 지원하는 서비스를 계획하였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얼핏 들으면 납득이 되는 좋은 기획인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의 외국인 학생들이 대부분 공대생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말이죠. 독거노인을 위해 손자들을 연결해주는 큰 글씨의 앱이나 서비스를 만들어주는 것 또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충분한 <왜?>가 있지 않습니다. '요즘' 60대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80%가 넘습니다. 손자들에게 원터치로 조부모와 연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준다한들 이미 멀어진 그들 사이에 끈끈함이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서비스 제안자는 그들이 실버 커뮤니티를 가입하게 하거나 자기 계발을 통해 스스로 자존감을 챙길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로 아이디어를 바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과정에는 올바른 <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설문지는 몇 명에게 돌릴 것인가? 누구에게, 어디서 할 것인가? SNS를 통해 데이터를 얻었다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20대가 창업을 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 경제적 어려움 때문인가? 꿈 많은 20대는 정확히 어떤 대상을 말하는 것인가? 요리 가게 지원 사업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가? 혹은 요리 지원 사업이 20대보다는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노인 인구에게 더 적절한 사업이 아닐까? 같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폭넓고 체계적인 사용자 관찰, 시장 조사, 창의적인 아이디어, 끊임없는 사용자 피드백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려는 자세를 가지고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시스템 디자인을 디자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올바른 <왜?>를 통해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멋진 디자이너는 제품의 기획과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에 올바른 <왜?>를 만들고 그에 합당한 적절한 <때문에>를 찾아낼 줄 압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그래서>로 내밀 줄 알죠.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수행된다면 훌륭한 시스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장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어렵우며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일단은 눈에 보이는 UI화면을 만들거나 모델링, 영상, 사진 기술에 좀 더 힘을 쏟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멋진 디자이너들은 항상 호기심이 가득하고 올바른 곳을 긁어내지 못하면 참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니즈나 문제점을 찾고, 누구도 해결한 적 없는 문제에 답을 내려는 노력을 통해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기반을 다지곤 하지요. 그 후에는 제품을 제작하고, 앱을 만들고, UI 컴포넌트를 배치하고, 현수막을 제작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의 결과물이 나타납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고생을 몰라줄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프로젝트의 수혜를 받은 대상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며 여러분은 한 층 더 훌륭한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