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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김 Apr 01.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쿤데라 | 민음사

"이건 악순환이야. 음악을 점점 크게 트니까 사람들은 귀머거리가 돼. 그런데 귀머거리가 되니까 볼륨을 높일 수밖에 없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채 늘씬하고 아름다운 다리로 버티고 선 여인, 옷을 다 갖춰 입은 남자는 그녀의 머리에 중산모자를 얹는다. 그들은 오랫동안 꼼짝없이 서 있다. 말없이 섹스를 한다. 여자는 가벼운 삶을 꿈꾼다. 그녀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다. 그녀의 어머니, 남자, 만났던 모든 남자를 떠난다. 배신에 대한 두려움보다 배신이 가져다줄 새로움의 광활함이 그녀의 선택을 이끈다. 체코에서 제네바로, 제네바에서 미국으로. 중년의 그녀는 미국에서 만난 노부부에게서 부모와 자식 간의 온정을 느끼지만, 노부부는 늙어 그녀는 다시 떠나야 한다. 그녀는 그들을 또다시 배신할 것이다. 그러나 배신의 주는 광활함은 언제까지 주어질 것인가? 그녀는 자신을 기억해줄, 자신이 배신했던 또 다른 남자를 떠올리고 삶이 한없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배신당한 남자는, 그녀가 떠난 이후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의 시선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그녀가 한심하다고 여겼을 행진에 참여하고 나서야 이내 자신의 삶은 꿈이나 다를 바 없는, 무형의 시선이 아니라 현실의 존재, 즉 자신의 곁을 지키는 안경의 여인에게 있음을 깨닫지만, 그 자리에서 죽는다.


중산모의 남자는 자아의 유일성을 찾아 헤맨다. 자아의 유일성은 상상할 수 없는, 짐작도 계획도 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수백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다. 수백의 여자로부터 그들의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자아를 찾아낸다. 그의 바람둥이 기질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시골 여자 테레자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테레자는 모든 정조를 그에게 바쳤고, 어떤 여자와도 섹스 외의 것은 하지 않던 그가 테레자와 평생을 손을 잡고 잔다. 그와 테레자, 테레자의 개 카레닌은 시골에 간다. 새로운 자아를 찾아내는 그의 여행은 끝이다. 그들의 개 카레닌처럼 반복의 시간 속에서 행복을 느끼다 나란히 세상을 떠난다.


인간의 사랑은, 삶은, 자아, 무거운 모든 삶의 짐은 깃털처럼 가벼운,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늘 맞닿아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양극의 존재가 아니다. 부조리한 탄압과 자유, 가벼운 사랑과 무거운 사랑, 삶과 죽음은 대립하지 않고 갈등을 겪을 뿐이다. 진정한 갈등은 진정으로 가까운 관계에서만 허락된다. 그리고 갈등은 늘 화해를 요구하는 법이다. 가벼움은 무거움을, 무거움은 가벼움을 항상 이해하고싶어하며 그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 민음사





"그녀는 문을 열었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채 늘씬하고 아름다운 다리로 버티고 섰다. 머리 위엔 중산 모자가 얹혀 있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토마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토마시 역시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척 격한 감정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에서 중산모자를 벗겨내 머리맡 테이블에 놓았다.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랑을 나눴다."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지었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 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여자

"여자로 사는것, 이것은 사비나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에게 강요된 상태에 대해서는 그에 적합한 태도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사비나의 생각이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그녀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였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더 이상 테레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체 각 부위가 커지거나 작아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자기 자신일까? 여전히 하나의 테레자로 남을 수 있을까? 당연하다. (...) 이런 질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테레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없는 질문이다. 대답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물은 수세기 동안 흘렀고, 인간의 역사는 강변에서 이루어졌다. 역사는 다음날 잊혔고, 강물은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Einmal ist keinmal. 한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번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사실 어느 때보다도 잔혹했던 이 시절, 공산주의 국가의 극장에 넘쳐흐르던 소련 영화는 믿지 못할 정도로 천진성에 물들어 있었다. 두 소련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갈등은 연인 간 오해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반쪽엔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나머지 반쪽인 우익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실제로 이 개념이 근거한 어떤 이론 원리에 따라 이 개념의 어느 한 쪽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정치 운동은 합리적 태도에 근거하지 않고 표상, 이미지, 단어, 원형들에 근거하며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정치적 키치를 형성한다."


"우리 중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국가가 시골에서 그 세력을 상실하는 것은 아무도 시골에 뿌리내리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땅 주인이 아니라 밭에서 일하는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부는 전원 풍경이나 농사일에 아무런 애착도 없었고 잃는 것을 두려워할 만한 것도 갖지 못했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한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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