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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김 May 26. 2021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기차가 도착한다. 비즈니스맨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고속열차 중 하나다. .. 이제 풍경은 어서 지나가기만 하면 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 되어버린다.'



보뱅의 산문은 예고 없이 독자를 불러들인다. '당신'이라 칭해진 독자는 별수 없이 텍스트를 따라가며 그 여정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나인지 '당신'인지 모른 삶의 파편을 따라갈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책장을 넘기지 않기엔, 잃어버린 나의 나날을 읽지 못할까 봐 생기는 두려움과 초조함을 외면할 수 없다. 책을 덮으며, '당신'이자 나는 프로방스의 시뻘건 산불처럼 사랑이 나를 휩쓸고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고독을 벗 삼는 건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책을 읽거나 졸거나 걷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하늘의 빛들이 벽지 위에서 희미해져 가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당신이 신문을 빠짐없이 낱낱이 읽을 수 있는 건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위정자의 얼굴에서 운동선수의 다리로, 남아메리카에서 중국의 오지마을로, 달러와 환율에서 실업률로 눈길을 주면 차근차근 읽어나간다. 신문 읽기는 진지한 행위이다. 진지한 모든 일이 그렇듯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피아노 책, 행복이 항시 존재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말과 정령, 갈대밭의 바람은 언제나 있어 왔다. 태초부터, 아시아의 초원과 광막한 숲과 푸른 호수에서 신이 탄생한 무렵부터.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 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 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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