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폴라니 | 책세상문고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만유인력에도 불구하고 새가 하늘 높이 솟아 오른다는 것이다.
01 어떤 것은 상품이 되어선 안된다.
인간은 판매하기 필요에 따라 더 많이 혹은 덜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노동'은 어떨까? 노동 또한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노동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특정 직업의 생산량, 작업 시간, 임금으로는 그 노고와 고통에 대해 절대 알 수 없다. '시급'으로 직업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에 우리는 불쾌감을 느낀다. 숫자에 가려 노동에서 오는 개인적인 체험과 노고가 무시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섹스를 생계수단으로 삼아, 개인의 성행위가 상품이 되는 것은 우리 본능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
'노동'이 낳을 수 있는 경제적 부의 잠재력이 상승함과 함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인간의 삶이 아닌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를 사회 전체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구 전체에는 '노동'이라는 인간 활동이 기하급수적으로 복제된 것이다.
한 때 '가정주부'의 가사 노동이 임금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뉴스가 화젯거리였다. 이는 가사가 임금 노동에 비해 경제적으로 쓸모없다는 이유로 전업주부가 가정에서 당하는 무시에 대해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적극적인 효과를 발했다. 그러나 가사가 높은 임금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가정에서 평등한 취급을 받을 수 있음은 결국 아이를 돌보고 식자재를 조리하는 인간의 본연적인 활동을 경제 체제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결국 가사의 경제가치가 낮아진다면 가사 노동의 가치는 심각한 훼손을 받고 전업주부의 명예 또한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일은 본연적이고 개별적으로, 시장이 낳는 가치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우리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사회에 시장 메커니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가 시장 경제에 지배당하고 있다. 관리자나 사회 계급의 상위 사다리에 있는 자는 시장 경제의 원리를 잘 알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조망하면서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능력과 권위를 책임 없이 누릴 수 있다. 대가는 그들이 아닌 사회 전체가 치르는 것이다. 그리고 사다리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더 많은 것을 치러야한다. 그들은 인생 전체가 상품화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02. 우리는 스스로를 알고 있는가
경제 체제가 만든 계급의 분리는 부당한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계급 전체는 사회 이익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다른 계급의 이익까지 포괄해야 지도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위해 계급은 그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잡한 경제 문화의 구조는 개인은 물론 사회 자신도 그 정확한 역학 관계를 인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복잡성은 개개인이 계급 정체성을 잃게 하고, 계급이 나아가야 할 방향 또한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투쟁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원하지 않는 행위에 아주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래서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알기 위해 타의 적으로든 자의적으로든 이전보다 훨씬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중은 눈에 띄고 자주 보이는 것에 자신을 몸담고 싶어한다. 상당수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공통점을 갖춘 커뮤니티라면 반항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담는다. 웹상에 나타나는, 초 단위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계급은 충동적이고 한시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계급의 보편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폴라니는 경제 체제가 인간과 자연을 상품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결단의 중요성'을 나아가야 할 방향성으로 제시하였다.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점은 누구나 눈앞에서 볼 수 있지만 해결책은 불안하리만치 요원하다.
칼 폴라니 | 책세상문고
주요 문장들
노동과 토지가 마치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인들 양 취급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실제 상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코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생산된다 하더라도 (노동의 경우처럼)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효과적인 허구가 고안된 적도 없었다 노동과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하게 됨에 따라, 그것들에도 시장 메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은 인간에게 붙여진 다른 이름일 뿐이며, 토지 역시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변화의 넓이와 파장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품 허구(commodity fiction)은 인간과 자연의 운명을, 자체적인 법칙에 따라 통제하고 궤도를 따라 스스로 작동하는 자동장치의 작동에 넘겨준 것이다.
제도화된 메커니즘이 매일 인간의 활동을 통제하고 자연 자원 또한 통제한다. 물질적 행복을 담당하는 이 기구를 통제하는 것은 오직 굶주림과 이익이라는 동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생필품 없이 살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윤에 대한 기대뿐이다.
시장 경제에서 굶주림과 이익은 '소득을 벌어야 하는' 필요성을 매개로 하여 생산과 결합한다. 왜냐하면 시장 경제 아래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에서 재화를 사지 않을 수 없으며, 재화를 사기 위해서는 다른 재화를 시장에 팔아서 얻은 소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득의 명칭은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즉, 노동력, 토지, 화폐의 사용 대가로 각각 임금, 지대, 이자라는 이름의 소득을 얻는다.
시장 경제는 놀랄 만큼 엄청난 단절을 가져왔다. 시장의 지배라는 현상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자급자족하는 가정 경제에서 간혹 남아도는 물건이 있을 때 그것을 처리하는 장치였던 시장은 생산을 지휘하는 것도 또 생산자에게 안정적으로 의지할 넉넉한 소득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모든 소득이 판매를 통해서만 나오고 상품들은 오로지 구매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현상은 오로지 시장 경제에서만 적용되는 일이다.
굶주림과 이익은 그 자체로 특별히 '물질적' 인 것은 아니다. 또 자부심, 명예, 권력 등이 굶주림과 이익보다 반드시 '고상한' 동기라고 할 수도 없다. (..) 그러나 굶주림이든 성행위이든, 인간 존재의 '물질적' 요소와 '이상적' 요소의 구별을 아예 제도화해버리면 사회의 파멸을 불러오게 된다. (..) 이것이 토니R. H. Tawney가 경고한 바 있는 '물욕에 병든 사회 sickness of an acquisitive society'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로버트 오언 Robert Owen이 이윤 동기를 '개인 및 공공의 행복에 전적으로 해로운 원리'라고 꿰뚫어본 것은 그의 천재성의 최정점이었다고 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만약 국가의 어떤 강제적 조치에 자신의 개인적으로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은 그 조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사회에 실업과 빈곤이 창궐한다고 해도 그런 사태로 인해 개인적으로 이득을 보지 않았다면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개인적 차원에서 비협조를 감행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집단의 생존에 필수적인 만큼 성원들의 복종을 확실하게 이끌어내는 것이 권력의 기능이다. 흄 David Hume이 말했듯이,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성원들의 개인적 견해이다. 어느 누가 아무 견해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인간의 노동력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인간' 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마저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 그들은 악덕,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동하는 사회적 혼란의 희생물이 된다. .. 원시 사회가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화폐 부족이나 과잉은 경기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제 발전과 더불안 상업과 산업의 관계에서 산업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되었다. — 산업 생산은 이제 장기 투자와 그에 따른 위험을 내포하는 일이 되었다. — 산업 생산이 복잡해질수록 공급을 보장해야할 산업 요소들의 종류도 늘어났다. — 노동, 토지, 화폐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다. 즉, 상품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사회는 이제 모든 면에서 경제 체제의 부속물이 되어버렸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공장 입법과 사회 입법이 필요했다면, 그리고 상품 허구가 토지에 관해 의미하는 바에 맞서 자연 자원과 농촌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토지 관련 법률과 농업 관세가 나타났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 허구를 화폐에 적용하는 데 내포된 위험에서 공장이나 다른 생산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중앙 은행과 관리 통화 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인간과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 그 자체도 자기 조정 시장의 파괴적 효과를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대중이 '변화한다면' 사회 구조를 깨지 않고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 인간적 정의와 공동체를 실현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없다. 인간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완벽하게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