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AI가 나를 대체하면 편하지 않을까?

by 바다김




AI를 다루는 직업이지만 AI에게 대체될지도

때는 9년 전, 지도교수님이 당시 한국에 출시도 되지 않았던 아마존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를 제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걸로 디자인 연구를 해봐라.”


그 한마디로 저는 AI와 생존을 건 숙명적인(?)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학원에서 AI의 사용자 경험을 5년 동안 연구했고, 이후 회사로 옮겨 AI 프로덕트를 만드는 대기업에서 일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AI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사이 AI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이거 봐, 구글 어시스턴트가 내 말에 똑똑하게 대답한다니까?”라고 했을 땐 모두가 시큰둥하거나, 흥미를 보이더라도 마치 SF영화 보는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AI 제품이 실제로 출시되기 시작하자 업계에서는 ‘이걸 잘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고객들 역시 AI가 언제든 자신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대체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이것도 기계가 하고, 저것도 기계가 하면 그럼 대체되지 않는 일은 뭔가요?”


한 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상 空想 을 즐기던 소설가와 예술가들의 전유물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MBTI만큼 유행하는 대중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기술로 인해 많은 직업이 ‘이미’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죠. ‘언젠가’ 이 질문에 대답해야겠다고 막연하게 미루던 사람들에겐 당장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급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인간의 역사는 기술의 등장과 새로운 직업의 탄생은 반복되어 왔다, 마치 주판을 다루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프로그래머가 생긴 것처럼 당연한 현상이다.” 고 말합니다만, 이미 직업이 사라진 사람들과 경력직 공고만 남은 세상에서 구직 중인 사람들에게 실질적 위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전 세계 노동인구는 약 33억 명*인데, 이들은 남은 커리어에서 AI보다 나은 점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 또한 그 물결을 몸으로 받아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묘한 전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마치 ‘대체되지 않는 일’이 있어야만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래 예측을 그만두면 안 될까


사람들은 ‘믿을 만한 답’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는 것 같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미래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의 말은 대개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AI가 예술의 영역은 ‘절대’ 침범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이 이름을 알만한 매체에 나와서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AI는 이미 작곡도 하고, 소설도 쓰고, 광고 사진도 작업합니다. 결국 그 AI를 사용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냐? 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핵심은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갔다는 것이고 AI가 만든 창작물은 실제로 돈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군가는 그 일을 잃었습니다.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미래를 예측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미래란 붙잡히지 않는 것이며, 우리에게 닥쳐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미래를 확정적으로 말하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미래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의 직업은 AI에게 대체되면 안 되는 걸까요? 세탁기가 발명되어서 구부정한 허리로 빨래방망이를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내게 필요한 곡물을 재배하고 집안일을 하고 일을 관리하는 것을 AI가 해준다면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요? 특정한 ‘작업’이 대체되면 안 된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AI뿐 아니라 변화 자체를 거스르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이 오든, 핵전쟁이 오든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합니다. 그 변화가 좋든 싫든, 세상은 계속 변한다는 사실을 거스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직업의 상실보다 두려운 의미의 상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 무섭고, 불안할까요? 왜냐하면 AI가 내 삶의 의미를 침식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는 일에 나름의 ‘의미’를 불어넣으며 살아갑니다. 연봉이 작아도, 작업 환경에 불만이 많아도 그래도 ‘이것은 의미 있는 일이니까’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 이것은 의미 없는 일이야.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를 입에 달고 살더라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으니까 그 일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긍심이라고 부르진 못할지언정 길가에 나서서 구걸을 하거나 돈 자체를 위해 저급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반증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AI가 그 작은 의미마저 가로채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내 삶은 무의미해지는 것일까요? 이것은 심각한 실존적 문제입니다. 인간은 힘든 삶을 견디는 능력은 가졌지만 의미 없는 삶을 견디는 능력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인간은 죽은 존재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생존을 위한 존재에서 의미를 위한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동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길가에 돌멩이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아무것도 아닌 남들의 인정에도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심장이 없어도 거의 모든 것을 인간보다 잘할 수 있는 AI가 ‘이미’ 세상에 도래했을 때 잉여가 된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 논의는 ‘어떤 직업이 남을까’ 보다는 실천적입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자동화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예측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엉터리’ 거나 ‘운이 좋아야 겨우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것이 의미 있는 일인지 알 수 있다면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삶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직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생존을 위한 실천적인 문제니까요.





어떤 일을 의미 있게 여기는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만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어떤 직업이 남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의미 있게 여기는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의 문제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면, 저는 앞으로 다섯 가지 일이 우리에게 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첫째는 타인과 마음에 동화되는 일입니다.


저는 고객과 인터뷰하고 고객과 관련된 데이터를 분석해서 의사결정을 돕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의 가장 어려운 점은 냉철한 분석기법으로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것도, 데이터의 정합성을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편향을 이겨내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숫자를 들이밀어도, 체계적인 사례수집방법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문제에 공감되지 않아서 일이 시작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대부분의 고위 경영진이나 리더들은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통해 일을 처리하다 보니 그것에 담긴 내용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일이라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키오스크의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은 실무자라면 ‘60대 사용자의 결제 실패율’ 데이터를 정리하는 것보다 직접 의사결정자를 이끌고 30분간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고객들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있습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문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문제가 내 마음에 동화될 때만 우리는 그것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둘째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왜 우주여행에 집착할까요? 단순히 수 백 년이 될지 수천 년이 될지 모르는 ‘미래세대’의 후손이 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본이 몰리고 최고로 뛰어난 인간들이 삶을 헌신하는 걸까요?


우리가 심해를 탐사하고, 우주여행에 힘을 쏟고, 태양의 에너지를 활용하겠다고 애쓰고, 잘 모르겠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미는 원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모르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하는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에 가면 ‘이런저런 것을 확실히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는 ‘우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의 실존이 우리를 그다음 영역을 탐험하게 합니다. 우주여행에 필요한 기술을 기계가 개발하고 우주여행도 기계가 대신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는 일은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는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어떤 미래가 좋겠다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19세기에 의학 “전문가”들은 생리와 출산이 여성의 몸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고등교육과 일자리로부터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권은 거의 없습니다. 피부색이나 성,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삶을 가질 기회가 주어지는 미래가 좋겠다고 희망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더 먼 과거에는 여성이 투표권이 없거나, 특정 피부색이 더 열등하다고 믿는다거나, 노예가 있어도 ‘괜찮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미래에는 어떤 삶이 더 나은 미래라고 희망하면 좋을까요? 구매버튼만 누르면 반나절만에 택배가 도착하고, 버튼 하나로 SNS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되고, 피드만 내리면 시간을 때우기 최적화된 콘텐츠가 등장하는 현재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도 다시 희망하고 싶은 미래일까요?


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결국 기업이 하는 일은 창업주, 그리고 구성원이 ‘각자가 생각하는 더 좋은 미래’를 경쟁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요. 어떤 내일이 다가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일은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겁니다.




넷째는 책임지는 일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아이가 어떻게 자랐든 양육은 부모의 책임이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입니다.


흔히 ‘민주적인 가족회의’를 이상적인 양육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에게도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주고, 가족의 중요한 안건에 대해 의견을 묻는 방식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면, “세 살 배기도 가족의 의사결정에 참여시킨다”는 원칙 자체를 누가 정했을까요? 그 결정은 결국 어른이 내렸습니다. 가장 민주적인 형식을 채택하겠다는 선택조차, 사실은 누군가의 독단적인 책임 위에서만 가능했던 셈입니다.


AI가 어떤 판단을 하든, 기계가 기계 사회를 어떻게 최적화하든, 인간 사회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책임은 인간에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 더 좋은 조직인지, 이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그 결과가 기대와 달랐을 때에도 “그 선택은 내가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 저는 그것이 AI 시대에도 인간에게 남은, 그리고 남아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으로 남기 위해 '이 것은 내 책임이다.' 라고 마지막으로 말 한 적이 언제인가요?




다섯째는 사랑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대상을 고르는 행위나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 혹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스쳐가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고도화된 지성의 영역이며,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순전히 자신의 일입니다. 자발적으로 내 일을 사랑하고, 내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을 사랑하는 일 말입니다. 누군가, 혹은 어떤 기계가 나에게 사랑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 자신만을 지킬 때 가장 가난해집니다. 무엇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태도가 아니라, 가진 열정과 시간을 쏟아 누군가에게 건네줄 때 오히려 더 풍요로워집니다. 계산하면 손해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주고 나서야 비로소 삶이 확장되는 경험. 이것은 효율로 설계된 존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인간만의 초능력입니다.


로봇과 연애를 하더라도,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일입니다.




모든 것이 변할 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미국의 SF 소설 작가 Bruce Sterling이 말한 Pace Layers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잘 뜯어보면 여러 겹(Layers)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각각 다른 속도로 변한다고 합니다. 거리의 패션, 유행하는 바지가 변하는 속도가 가장 빠릅니다. 패션을 공급하는 청바지 업체의 지형이 변하는 속도는 그에 비하면 느립니다. 의류에 대한 법과 인프라가 변하는 속도는 더욱 느리고, 의(衣)에 대한 문화는 더더욱 느리게 변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본성은 거의 변하지 않고요.


이러한 차이 때문에 기술의 등장과 이로 인한 결과에 상당한 시차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실 인공지능은 1943년에 등장한 오래된 개념이지만 지금에 와서야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죠. 현대 사회는 초지수적으로 성장하며 해결할 문제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인간의 대응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고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지만 여전히 달도 뜨고 지구의 수명도 몇 억년 남았고 바다는 푸르고 산은 높이 솟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볼갗을 스치는 바람도 그대로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몸을 던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디딛고 있는 지반에서는 아주 느린, 거의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곳에 발을 디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인간에게 남은 일인 ‘미래를 희망하는 일’을 하나 꼽자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불안이 몰려와도, 그래도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입니다. 코로나가 당장이라도 지구를 멸망하게 할 것 같더니, 여전히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니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페르소나는 예쁜 쓰레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