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노처녀 맞선보다

도도하고 차가웠던 시간의 추억

by 김경희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은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주변에도 많이 있지만

나에겐 사랑도 남자도 결혼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괜 시리 내가 좋다고 열심히 쫓아다니다

나에게 호된 창피를 몇 번이나 당하고

수척한 모습으로 군대를 가야 했던 명훈이.


다짜고짜 한번 사귀어 보자던 태호는

그럴 생각 전혀 없다는 내 반응에

시험기간인데도 몇 주씩이나

밥을 안 먹고 시름 거리다 겨우 학사경고는

면했지만 강시처럼 내 앞을 알짱거렸다.

그때 나는 '제가 왜 저러나' 하는 맘으로

태호의 아픈 시간들을 무시한 채 지나쳤었다.


어느 날, 태호의 여동생이 나를 보자고 해서

다방에서 만났는데

“대체 언니가 우리 오빠한테 뭘 어찌했길 래

오빠가 저리 식음을 전폐하고 죽을상을 하고 다니냐 “며

따져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짓이 없다고.

다방에서 차 한 잔 마셔본 적도 없고

단 둘이 만난 적도 없는데

내가 어찌 아느냐며 태호 여동생에게 되려

네 오빠 마음이나 잘 붙잡으라며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대학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그 후로도 같이 활동하던 남자애들이

간혹 가다 주파수를 던지기라도 할라치면

나는 곧바로 그 애들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되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처럼 굴기 일쑤였다.


참 우습기도 하지.

절세가인도 아니고

요조숙녀도 아닌 나에게

왜들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명훈이와 태호에게는 많이 미안하기도 하고

참 우습기도 하고 그런다.


결혼이란 것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서른두 살의 노처녀 언니가

십 년도 더 오래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어느 순간 갑자기 했던 결혼은 나에게 실로 충격이었다.


충격을 넘어서서 언니가 결혼한 이후로

이젠 네 차례라며 시집가라고 날이면 날마다

들들 볶아대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오늘은 바다 다방에서 선을 보았다.

동갑내기 남자 하고.


나는 엄마랑 임신해서 잠시 쉬러 내려온 언니하고

셋이서 선보는 장소로 나갔고

그쪽은 누나 내외하고 어머니하고 넷이서 나왔다.

선보러 나온 남자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키도 작고 얼굴은 넓죽하였다.


서로 소개를 한 후 조금 있다가

나와 그 남자는 준 다방으로 나와서

잠시 얘기를 나누다 15분도 채 안되어서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보니 토요일이라

아빠께서 일찍 퇴근해서 돌아오셨는데

선 본 남자 인상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그랬어요." 라며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빠랑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었다.


내가 돌아온 후 두 시간도 더 지나서

엄마랑 언니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웃으며 돌아왔다.

그쪽 매형 되는 사람이랑 누나는 자기 동생 자랑하느라

우리 언니랑 엄마는 내 자랑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늦게 왔다며

저녁까지 함께 먹고 왔다는 것이다.


나원참!

선을 본 당사자들은 금세 돌아왔는데

들러리로 나간 사람들이 함께 저녁까지 먹고 오다니......

이해하기 힘든,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무관심으로 덮어버리며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데 글자가 눈으로 안 들어왔다.


그 남자 성실하기가 그지없고

사람 됨됨이가 아주 버릴 것 하나 없는 사람 같다고

언니가 아빠에게 너스레 떠는소리가 들려왔다.

날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지 말던 지.

내가 결혼하는 거지 언니가 결혼하는 건가?

그렇게 맘에 들면 자기나 또 결혼하지.....

나는 괜스레 짜증이 나서 일찌감치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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