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가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해야 할 일들을 메워 넣느라 숨 가쁘게 넘기던 달력, 칸마다 빼곡히 적힌 글자들이 어깨를 누르던 날들이 있었다. 우리는 한 장의 달력을 통째로 비워두었다. 그 빈칸 속으로 바람이 들어오길 바랐다. 이름하여 ‘무계획의 달’.
배표 한 장만 끊고, 나머지는 제주에게 맡기기로 했다. 숙소도, 일정도, 맛집도 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햇살이 이끄는 대로 걷고 머물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보다 ‘어디에 머물까’를 고민하는 여행, ‘무엇을 볼까’보다 ‘무엇을 느낄까’를 기다리는 여행. 그 시작이 우리를 설레게 했다.
처음에는 조금 두려웠다. 혹시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숙소가 없으면 없는 대로, 길을 잃으면 잃은 대로, 결국 새로운 풍경이 기다릴 거라는 걸 알았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건 불안을 감수하는 일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기쁨을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여행자와 도민 사이의 어딘가였다.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먼저 다녀가고, 하얀 커튼 너머로 햇살이 손을 흔들었다. 그날의 메뉴는 냉장고 속 반찬이 아니라, 시장에서 무심히 집어 든 채소와 바다 건너온 생선이 정해주었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해안도로를 걸으며 바다와 눈을 맞췄고, 며칠 연속 같은 카페 같은 자리에 앉으며, 낯선 동네의 단골이 되어갔다.
날짜를 세지 않아도 날은 흘렀고,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하루는 저절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점점 가벼워졌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채우려던 욕심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제주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잊고 있던 ‘살아있음의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바람 냄새, 파도 소리, 별빛의 깊이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한 달의 기록이다. 최소한의 경비로 누린 낭만과 여유, 그리고 바람과 햇살, 파도와 골목의 냄새까지 스며든 하루하루의 흔적이다. 정해진 길 없이 떠난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예측할 수 없는 매일의 우연이 우리 삶에 어떤 색을 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무계획으로 산다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내 삶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고,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는 걸 제주가 가르쳐주었다.
비워둔 달력 한 장 속에서 우리가 얻은 건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내가 경험한 시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작은 쉼표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조금 다른 속도로 숨 쉬고 싶은 이들에게 제주의 바람과 햇살이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雅林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