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떠남을 위한 준비
떠나기 전날 밤은 언제나 묘하게 분주하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먼 길을 떠난 사람처럼 어수선하다. 시곗바늘은 분명 천천히 흐르는데도 시간은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 설렘과 귀찮음, 기대와 피곤함이 뒤섞인 채 방 안 공기가 묘하게 달아진다. 어쩌면 여행은, 떠나기 전날 밤부터 이미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막 시작될 한 달짜리 제주살이를 앞둔 오늘, 나는 아직 짐을 싸지 않았다.
내일 새벽 네 시면 길을 나서야 하는데, 우리 둘은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느라 정신이 없다. “언제 가방 쌀 거야?” 묻는 말도, “곧 싸이지.” 대답하는 말도 건성이다. 말은 오가지만 몸은 꼼짝하지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곳으로 가는 여행이라지만, 한 달이나 집을 비워야 하는데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남편을 탓할 수도 없다.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그이는 분명 어릴 적부터 벼락치기 공부를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벼락치기의 대마왕이었으니, 벼락치기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 않는다. 그저 누가 먼저 일어설지만 은근히 기다릴 뿐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을 따라 해야 짐 싸기가 한결 수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그랬다. 떠나기 전날 밤, 벼락치기로 짐을 싸는 것. 시험 공부도 하루 전날 집중력이 극대화 되듯, 여행 준비 역시 그렇다. 몰아치는 시간 속에서 단숨에 몰입하는 그 스릴. 잠들기 전까지 분주히 움직이는 긴박함. 그것은 어느새 우리의 작은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야 남편이 창고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왔다. 그제야 나도 따라 움직였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미니멀한 제주 한 달 살기’. 짐을 최대한 간단히 챙기기로 했다. 해외여행보다 훨씬 단순하게, 자동차로 떠나는 거니 하나의 가방에 다 욱여넣을 필요 없이 여러 개로 나눠 담았다. 메모도 하지 않았다. 그냥 주말 소풍 가듯 가볍게 챙겼다. 그래도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효율만 따지자면 성공적이었다. 싸놓은 짐 들을 보며 혹시 빠뜨린 게 있지는 않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처 챙기지 못한 건 그때그때 현지에서 구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여행 가방들을 현관 입구에 줄 맞춰 세워두고 돌아서니 베란다의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딸내미가 퇴근길에 들러 물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몰라 화분마다 넉넉히 물을 부었다. 받침대가 흥건해질 때까지. 늦은 밤 제라늄, 군자란, 올리브 나무, 뱅갈 고무나무, 꽃기린까지 깜짝 놀란 듯 흔들렸다. 허푸허푸, 작은 숨소리를 내며 물을 들이키는 것 같았다. 강아지가 살아있었을 땐 여행을 떠날 때마다 강아지 맡기는 일 때문에 더 복잡했지만, 이제는 식물들만 챙기면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나니, 한 달 동안 비워 둘 집이 새삼 걱정되었다. 집안 여기저기에 먼지가 수북이 쌓이지는 않을지, 굳게 닫힌 문 안에서 눅눅한 냄새가 배어나지는 않을지, 가스와 전기 차단은 확실한지... 별것 아닌 걱정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제주 한 달 살기를 무사히 마쳐야 계획하고 있는 ‘1년 살기’도 가능해질 터라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오직 한 가지, 잘 살아내는 것. 제주의 바람 속에서, 제주만의 시간 속에서, 잠시 제주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아침을 맞으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 바람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살아볼 것이다. 그렇게 출발 전날의 긴 밤은 천천히 깊어가고 있었다.